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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박재상 (평택대학교, 평택대학교 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지도교수
김문기
발행연도
2018
저작권
평택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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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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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의 기독교 민족주의를 그의 글에서 도출된 신사언행의 틀을 지고 분석하였다. 이것을 위해 먼저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하여 규명하였고, 이것을 토대로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세가지 유형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간의 유형화는 지나치게 단순하여 대개 단으로만 나누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도적, 통합적 유형인 비타협적 반개방형’을 새롭게 추가하였다. 이 유형의 대표적 인물인 박동완에 대한 연구를 기독교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시행하였다. 신사언행의 틀은 박동완의 삶과 기독교 민족주의를 종합적, 다차원적으로 이해하는데 유용하다. 그의 삶과 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 신사언행이 일치된 삶이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기초로, 생명과 사랑을 내용으로, 희망과 불굴을 기본적 태도로 하여 당시의 시대사조인 외력을 기반한 사회진화론에 대항하였다.
다시 말해 생명과 사랑의 예수정신을 원동력으로 하여 지언행합일(知言行合一)의 비타협적인 자세로 평생을 일관했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암흑의 일제강점기를 살았지만, 그는 절대적 희망을 가지고 불굴의 삶을 살았다. 결국 박동완의 기독교 민족주의는 ‘외력(外力)을 지양(止揚)한 생명과 사랑, 희망과 불굴(不屈)의 기독교 민족주의’로 요약된다.
박동완이 살았던 시대는 사회진화론이 대세였다. 기독교인조차도 사회진화론을 많이 신봉하였다. 사회진화론은 역사에 있어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을 부인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적 사고가 지배하기에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것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힘이 없는 것이 죄라는 논리에 따르면, 조선을 강탈한 일제는 잘못이 없는 것이다. 다수의
기독교인이 이것을 믿었기에 실력양성론, 외교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현실을 인식하고 친일로 전향하였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합리화319)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진보 사상은 성서적인 것이 아니다.
박동완은 빵, 계급과 무력을 통하여 혁명에 이르는 사회주의에 대하여 결국 성공하지 못할 불완전한 주의(主義)라고 비판하였다. 인간의 변화는 빵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 영생을 주는 예수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근본적 변화 없이 사회는 개조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권력, 금력, 지력과 같은 외력에 의해서 인간과 세상이 변혁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인
한 생명을 소유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외력(外力)을 지양(止揚)하고 내력(內力)을 주장한다. 이것은 ‘내연(內燃)이 외연(外延)’한다는 민경배의 ‘기독교의 구조적 신앙 원리’320)와도 일맥상통한다. 중풍 환자를 예수 앞에 데리고 나갔을 때 치유될 수 있었듯이,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조선과 조선인은 예수의 힘에 의해서만 회생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그는 먼저 힘을 길러서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실력양성론’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과 현상 넘어 있는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힘의 논리로 조선을 굴복시킨 일제는 사회진화론의 시각으로 보면 정당한 것이지만,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을 어긴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일제는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에 사탄적 존재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투쟁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다. 오로지 절대 독립과 비타협만이 그에게 있었다. 박동완은 사회주의와 함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는 유물론적 사회주의자가 아니고 성서적 사회주의자다. 예수를 통해서 진정한 생명을 소유한 자는 남을 사랑한다. 침략자, 핍박자, 원수라도 사랑한다. 그러기에 그는 대지진에 참상을 당한 일본인에 대하여 진정한 연민의 정을 표현하였다. 적인 일본이 잘못되었다고 기뻐하거나 지배국이었기에 안타까워한 것은 아니다.
박동완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을 노래한다. 희망을 버릴 수 없었기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불굴의 용기와 기개가 있었다. 고문과 감시 속에서도 타협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어간 스테반 집사는 죽음 넘어 계시는 예수를 보았기에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죽음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타협하거나 공포에 떨지만 진정한 생명과 부활의 주되시는 예수를 바라볼 때 죽음마저도 기쁨으로 다가온다.
박동완은 민족대표 중 비교적 젊은 나이인 만33세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죽음의 길이기에 나아가기를 꺼려하는 길에, 그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권유에 의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였다. 그는 당시 목사가 아니라 전도사였으며, 3·1독립운동의 기독교계 주류기관인 YMCA의 멤버이기는 하였지만 전임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일하였던 <기독신보>는 기독교 단체이지만 3·1독립운동 당시 주류 기관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민족대표 중 언론인으로서 참여한 것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3·1독립운동 후 창간된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같은 주류 언론기관의 기자도 아니었다.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그는 기독언론인의 신분을 10년간 버리고 독립운동가로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 독특한 삶을 살았다. 사회주의를 꿰뚫어보고 정확한 비판을 가하였지만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손잡고 신간회 창설과 초창기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망명 이후 한인기독교회의 모교회인 호놀룰루 교회의 담임목사가아니라 지교회인 시골의 와히아와 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사역하였다. 소천 1년 전 교단을 바꾸어 미 감리교 카우아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박동완은 주류이지만 비주류인 삶, 중심인(中心人)이었지만 주변인의 삶을 살았다. 그는 부르주아 출신이지만 소시민적 삶을 살았다. 그는 경계인으로서 특이한 삶을 살았다. 남들이 꺼리는 죽음의 길을 오히려 갔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인이지만 타종교인과 함께 하였다. <신생명> 폐간 후 그는 10년간 절필하고 언론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것은 생업을 버린 것이다. 당시 기독교 교역자들이 직업화 및 계급화 하던 상황과는 전혀 반대의 것이었다. 그는 국제 정치, 언론과 학문에 밝았다. 하지만 다수의 기독교인이 시대사조라 할 수 있는 사회진화론에 취해 있을 때 그는 이것을정면으로 반박하고 비타협적 절대 독립의 길만을 걸었다. 이것을 위해 그가 그토록 통렬히 비판하였던 사회주의자들과도 연합하여 신간회를 창립하고 운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망명하여서도 동지회의 간부로서 전혀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국민회와의 화합에 앞장섰다. 그는 민족과 교회의 화합을 위해서 환영받지 못했던 제3의 길, 중도의 길인 ‘비타협적 반개방형’의 외로운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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