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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구자원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조성산
발행연도
2018
저작권
성균관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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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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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6세기 전반의 倭變과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맺어진 約條를 통해 단절과 복원을 거듭하였던 조일관계의 대내외적 배경을 밝히고자 하였다. 기존 연구는 조일관계의 추이만을 설명하거나 변화의 원인 중 대외적 요인에 집중하여, 당대에 맺어진 약조의 의의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글은 16세기 전반에 있었던 왜변과 왜변 이후 맺어진 約條에 주목하였다. 왜변의 근본적인 원인은 通交를 억제하고자 한 조선과 확대하고자 한 일본의 입장 차이에 있었다. 왜변 이후 맺어진 16세기 전반 약조에는 조선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조선이 추구하였던 조일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왜구 억제를 위해 왜인에게 三浦를 개항하고 통교를 허락하였다. 조일통교는 무역과 접대비용을 중심으로 왜인에게 경제적 이득을 보장하였지만, 조선에게는 점차 늘어나는 접대비용으로 재정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때문에 15세기 중엽 이후 재정이 악화된 조선은 대일통교를 축소하여 재정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정책은 통교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었던 삼포의 倭人들과 대마도의 반발을 불러왔으며 三浦倭亂(1510, 중종 5)의 계기가 되었다. 삼포왜란을 진압한 조선은 壬申約條(1512, 중종 7)를 통해 왜인들의 권리를 대폭 박탈하였다. 하지만 이후 오랑캐들에게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왕도정치가 공감대를 얻으면서 대일정책에서도 유화책이 제시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蛇梁鎭倭變(1544, 중종 39) 이후 맺어진 丁未約條(1547, 명종 2)는 임신약조와 마찬가지로 왜인들의 권리를 박탈하였으나, 이전과는 달리 논의 과정에서 화친의 중요성이 강조되며 회유를 강조한 유화책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이후 합법적인 명일무역을 독점하던 일본의 大內氏가 몰락하면서 밀무역이 성행하였고 ‘嘉靖倭寇’라고 불리는 무장집단이 동아시아 해역에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은 가정왜구의 해적행위를 왜변의 일종으로 파악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전처럼 통교를 단절하지는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 강경론이 정국변화로 힘을 잃고, 중계무역으로 이익을 얻고 있던 척신들과 왕도정치에 공감하여 유화책을 주장한 관료들이 정국을 주도하였기 때문이었다. 乙卯倭變(1555, 명종 10)이 발발하였을 때 조선은 이전처럼 대마도의 짓으로 파악하지 않고 가정왜구에 의한 왜변으로 파악하였다. 때문에 조선은 대마도에게 을묘왜변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정미약조 이후 유지되던 조일관계를 재편하여 대마도를 회유하는데 을묘왜변을 이용하였다. 이에 조선은 을묘왜변 당시 대마도가 공을 세웠다는 명분으로 통교량을 확대시키는 丁巳約條(1557, 명종 12)를 맺었다. 이는 무역 확대라는 국제적 추세와 무역 억제라는 조선의 대외정책 목표 사이에서 형성된 타협점이었다.

목차

I. 머리말 1
Ⅱ. 中宗代왜변 대응과 통교 억제 5
1. 삼포왜인의 증가와 왜인정책의 정비 5
2. 왜변의 발발과 약조를 통한 왜인 통제 13
Ⅲ. 明宗代왜인정책의 배경과 유화책 24
1. 嘉靖倭寇의 출몰과 집권세력의 대응 24
2. 을묘왜변 이후 통교정책의 재편 33
Ⅳ. 맺음말 43
참고문헌 47
ABSTRACT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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