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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 자료유형
- 학위논문
- 저자정보
- 지도교수
- 유재춘
- 발행연도
- 2019
- 저작권
- 강원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48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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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고대부터 우리민족의 방어시설로서 존재해왔던 것으로서 조선후기 까지도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특히 산성은 청야입보라는 전술을 사용하여 산성의 효율성을 극대화 하였고,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몯 산성 전략의 기본은 청야입보전술을 기본으로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산성은 조선 초기 이후, 버려지면서 퇴락하게 되었고, 산성을 대신하여 읍성이 조선전기의 중심 성곽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등장은 조선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들이 해소가 되면서, 더 이상 산성중심의 불편한 방어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편의성을 지니게 된 읍성이 수축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읍성체계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읍성을 대신하여 조선 초기 이후 버려졌던 산성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고대산 성을 중심으로 하여 산성이 재수축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산성 수축은 청야입보 전술의 사용을 위한 것 이라는 초기연구 이후, 축성기술의 발전적인 측면에서 다시 재조명 되게 되면서 방어 시설의 문제점으로 인한 것이 새로운 근거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하지만 산성수축의 근거를 확대하여 본다면 전쟁의 초기 전황 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가 장기화가 되면서 전쟁을 이끌어갈 여력이 안 되었던 조선은 산성이라는 방어시설을 통해 전쟁의 장기전을 이겨 나가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축성기술 도입은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이 도입되었고 중국의 축성술은 기효신서를 통해 도입 시행 되었다. 또한 일본의 축성술은 전쟁기간중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이 종결된 후, 북방지역에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성수축이 이루어 지게 되면서 새로운 축성술 도입이 급속도록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전쟁이라는 상황을 빠르게 끝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이러한 실전과 축성술 도입은 전쟁이후, 이시발의 수성조약으로 나타날 수 있었고, 이후 수원화성 축성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모순적이게도 전쟁이 지속됨으로써 산성이 다시 선택 되었고 축성술의 발달이 이루어져 조선 후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산성은 조선 초기 이후, 버려지면서 퇴락하게 되었고, 산성을 대신하여 읍성이 조선전기의 중심 성곽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등장은 조선 초기의 불안했던 정세들이 해소가 되면서, 더 이상 산성중심의 불편한 방어체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편의성을 지니게 된 읍성이 수축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읍성체계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의 공격에 함락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읍성을 대신하여 조선 초기 이후 버려졌던 산성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고대산 성을 중심으로 하여 산성이 재수축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산성 수축은 청야입보 전술의 사용을 위한 것 이라는 초기연구 이후, 축성기술의 발전적인 측면에서 다시 재조명 되게 되면서 방어 시설의 문제점으로 인한 것이 새로운 근거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하지만 산성수축의 근거를 확대하여 본다면 전쟁의 초기 전황 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가 장기화가 되면서 전쟁을 이끌어갈 여력이 안 되었던 조선은 산성이라는 방어시설을 통해 전쟁의 장기전을 이겨 나가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축성기술 도입은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이 도입되었고 중국의 축성술은 기효신서를 통해 도입 시행 되었다. 또한 일본의 축성술은 전쟁기간중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이 종결된 후, 북방지역에서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산성수축이 이루어 지게 되면서 새로운 축성술 도입이 급속도록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전쟁이라는 상황을 빠르게 끝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중국과 일본의 축성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었으며, 이러한 실전과 축성술 도입은 전쟁이후, 이시발의 수성조약으로 나타날 수 있었고, 이후 수원화성 축성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모순적이게도 전쟁이 지속됨으로써 산성이 다시 선택 되었고 축성술의 발달이 이루어져 조선 후기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목차
- Ⅰ. 서론Ⅱ. 임진왜란시기의 성곽방어1. 임진왜란 이전의 성곽 방어책2. 임진왜란 개전 초기의 성곽 전투Ⅲ. 산성 중심의 방어시설 재정비1. 산성 중시론의 대두2. 방어시설의 재정비Ⅳ. 축성기술의 개선과 도입1. 조선 자체의 축성술 개선2. 중국 및 일본의 축성술1) 중국 축성 기술의 도입2) 일본 축성 기술의 도입3. 임진왜란시기 수축 성곽 사례1) 파사산성2) 금오산성3) 천생산성4) 금성산성4) 하동읍성Ⅴ.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