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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개로왕은 비유왕대 정계를 장악한 解氏세력을 국정운영에서 배제하고 왕족을 중용하여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그 일환으로 개로왕은 458년 유송에 표문을 올려 근친세력에게 제수한 ‘장군’호와 ‘왕’호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해당 인물들은 즉위 초 개로왕을 보좌하며 국정운영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는 ‘輔國將軍’에 임명된 동생 문주가 상좌평을 역임하며 개로왕을 보좌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개로왕은 餘紀와 餘昆에게 ‘장군’호와 함께 좌·우현왕의 ‘왕’호를 제수하였다. 좌·우현왕은 흉노에서 사용된 관작으로 선우의 차기 계승자로서 독자적인 영지와 군사권을 가진 존재로 파악되어왔다. 그런데 백제에서 좌·우현왕은 사신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左賢王 昆支가 461년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남흉노에서 좌·우현왕이 사신의 역할을 수행한 사례가 개로왕대 좌·우현왕의 성격을 보여준다.
당시 개로왕은 고구려의 평양천도(427년) 이후 본격화된 남진에 대응하여 주변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請兵使로 파견되어 주변국과 교섭을 진행한 사신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때 왕족이 그 임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61년 왜에 파견된 곤지의 사례와 472년 북위에 파견된 餘禮의 사례는 개로왕대 왕족의 역할이 대외교섭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두 인물에게는 각각 좌현왕과 ‘弗斯侯’라는 ‘왕’호와 ‘후’호가 제수되었다. 이를 통해 개로왕대 사행의 임무를 맡은 왕족에게 왕·후의 작위제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개로왕은 재위 전반기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 道琳을 등용하여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王卽佛’ 신앙의 북조불교는 왕권강화를 지향하던 개로왕의 사상적 뒷받침을 해주었다. 또한 ‘烝土築城’과 같은 중국의 선진 토목기술은 왕권의 신장과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개로왕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러한 ‘北朝文化’의 수용과정에서 좌·우현왕제 역시 백제에 전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현왕제는 개로왕이 추구한 왕족 중심의 국정운영 방식과 북조문화의 수용을 통해 시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정계에서 배제된 지배층의 이탈로 이어졌다. 곧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개로왕마저 전쟁 중 사망하였다. 결국 웅진천도 이후 해씨세력 등 귀족세력이 다시 발호함에 따라 개로왕대 추진된 일련의 정책들은 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좌·우현왕제 역시 개로왕대 이후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개로왕은 餘紀와 餘昆에게 ‘장군’호와 함께 좌·우현왕의 ‘왕’호를 제수하였다. 좌·우현왕은 흉노에서 사용된 관작으로 선우의 차기 계승자로서 독자적인 영지와 군사권을 가진 존재로 파악되어왔다. 그런데 백제에서 좌·우현왕은 사신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左賢王 昆支가 461년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남흉노에서 좌·우현왕이 사신의 역할을 수행한 사례가 개로왕대 좌·우현왕의 성격을 보여준다.
당시 개로왕은 고구려의 평양천도(427년) 이후 본격화된 남진에 대응하여 주변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請兵使로 파견되어 주변국과 교섭을 진행한 사신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때 왕족이 그 임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61년 왜에 파견된 곤지의 사례와 472년 북위에 파견된 餘禮의 사례는 개로왕대 왕족의 역할이 대외교섭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두 인물에게는 각각 좌현왕과 ‘弗斯侯’라는 ‘왕’호와 ‘후’호가 제수되었다. 이를 통해 개로왕대 사행의 임무를 맡은 왕족에게 왕·후의 작위제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개로왕은 재위 전반기에 고구려 출신의 승려 道琳을 등용하여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王卽佛’ 신앙의 북조불교는 왕권강화를 지향하던 개로왕의 사상적 뒷받침을 해주었다. 또한 ‘烝土築城’과 같은 중국의 선진 토목기술은 왕권의 신장과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개로왕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러한 ‘北朝文化’의 수용과정에서 좌·우현왕제 역시 백제에 전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현왕제는 개로왕이 추구한 왕족 중심의 국정운영 방식과 북조문화의 수용을 통해 시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정계에서 배제된 지배층의 이탈로 이어졌다. 곧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 한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개로왕마저 전쟁 중 사망하였다. 결국 웅진천도 이후 해씨세력 등 귀족세력이 다시 발호함에 따라 개로왕대 추진된 일련의 정책들은 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좌·우현왕제 역시 개로왕대 이후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목차
- Ⅰ. 머리말 1Ⅱ. 장군·왕호의 활용 배경 4Ⅲ. 좌·우현왕의 성격과 역할 12Ⅵ. 좌·우현왕제의 수용과 의미 20Ⅴ. 맺음말 29부록 31參考文獻 32Abstract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