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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己丑獄事는 鄭汝立이 역모를 실제로 한 사실이 있었는지에 대해 논의를 집중하여 誣獄인지 逆獄인지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하지만, 결론이 양쪽으로 갈리는 원인은 무엇보다 빈약하고 부족한 사료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己丑獄事의 告變부터 시작하여 위관 鄭澈이 실각할 때까지의 과정과 관련자들의 기록을 종합해보고 역모의 구성요건과 대비해보면 誣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정여립은 대대로 文班가문이었고, 자신도 弘文館의 修撰으로 임용되어 經筵에서 임금과 토론하는 박식한 선비였지 武人이 아니었고, 武人들과 특별히 교유하지도 않았다. 정여립은 선조 18년(1585) 4월경 임금인 선조가 개혁을 실행하거나 조정의 중심을 잡아야 함에도 이를 멀리하는 것을 보고 낙담한 나머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전주로 낙향하여 죽도에 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지역을 방위하기 위하여 대동계를 조직해서 매월15일에 강론도 하고 무술훈련도 하는 등 중앙 정치와는 떨어져 있었고, 자연히 사직 후 4년이나 지난 선조 22년(1585) 10월 2일 告變이 있던 즈음의 조정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정여립이 역모를 하고 있다는 告變이 근거지인 全州가 아닌 황해도 안악에서부터 제기되자, 정여립은 이를 5일경 전해듣고 도주하였고, 도주 중 8일만(10월 14일)에 자살을 하는 바람에 역모가 마치 사실인 양 인정되었고, 이에 告變을 조종한 정철, 송익필 등 西人들이 당파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東人 전체 사림들에게로 獄事를 확대시켰고, 宣祖는 서인들의 편에 서서 세력있는 껄끄러운 동인 신하들을 쓸어내서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하는 서인들과 선조간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己丑誣獄이 정여립 3족의 滅門은 물론이고, 2년반 가까이 진행된 獄事로 李渤 등 호남의 유능한 선비들과 영남의 선비 최영경 등 줄잡아 무려 1000여명 대부분이 杖殺되고 유배되는 慘禍였던 것이다. 이제라도 애초에 鄭汝立의 逆謀는 없었다는 伸?의 단초로 삼기를 기대한다.
목차
- Ⅰ. 序論 1Ⅱ. 16世紀末의 朝廷 葛藤 狀況 4Ⅲ. 鄭汝立의 삶과 己丑獄事 151. 鄭汝立의 生涯 152. 己丑獄事의 始末 23Ⅳ. 己丑獄事에 대한 두 가지 視線 311. 誣獄을 主張하는 觀點 312. 逆獄이 妥當하다는 見解 39Ⅴ. 己丑獄事의 再照明 41Ⅵ. 結論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