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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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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권보경 (동국대학교,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지도교수
임영애
발행연도
2022
저작권
동국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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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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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을 한반도에서 사용한 기원전 2세기 이후, 철은 각종 도구로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이러한 철이 활동 도구가 아닌 종교적 대상물로 현현한 것은 9세기 신라 하대이다. 우리나라의 철불은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특수한 시기인 신라 하대에 발상의 전환으로 조성되었다.
신라 하대는 정치적으로 혼란하였으며, 신분제도로 인한 갈등이 촉발되었고, 지방세력이 성장하여 등장하는 시기로, 반란과 민란이 빈번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새로운 불교 사유 체제인 선종이 유입되어, 당시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한 불교 역시 변화를 맞이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변동기에는 혼란이 따르지만, 동시에 변혁이나 혹은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신라 하대 사회의 변혁은 불교미술에서 철불을 탄생시켰다.
기존 연구에서 파악했었던 철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원인은 선종의 성격, 호족의 성향, 동 부족으로 축약해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철불을 만들기 시작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朱錫”의 수급 문제임을 밝혔다. 주석은 불상을 포함한 청동제품을 만들 때 적은 양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금속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산출되지 않아, 지금도 다량 수입하고 있다. 주석은 고가였으므로, 신라는 저렴하게 주석을 얻기 위해 당의 동전을 들여왔다. 이렇게 들여온 주석은 왕경 안의 불상 및 각종 청동제품 제작을 충당하기에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새로 들어온 선종이 지방에서 사세를 확장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자, 신라 왕실 역시 선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 지방에 대한 지배를 공고하게 하는 일에 관심이 높았던 문성왕은 선종 사원과 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며, 지방에 대형의 불상을 조성하여 왕실의 권위를 보이고자 하였다. 다만 다수의 지방 사찰에 銅佛을 조성하기에 사회·경제적인 부담이 컸으므로, 철을 이용하여 대형의 불상을 조성하였다. 당시 신라의 제철 기술은 철불을 주조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해있었다. 철불은 주조할 때 외형틀 분할선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현존하는 철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판단하는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외형틀 분할선이 나타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성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철불은 중국의 철불 조성 기술이 들어온 것이 아닌 자체적인 기술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철은 동과 주석이 섞인 청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하므로, 철불은 금속 불상의 대중화에도 영향을 끼쳐 지방의 다양한 발원자들에 의해 조성하여 봉안되기에 이르렀다. 엄숙하고 위엄있는 도량을 위해 철불을 조성했던 시기, 대형의 강력한 철불에 대한 인상은 신라 말기의 혼란이 극심해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에게 점차 철불이 사역을 수호한다는 개념을 불러일으켰다.
고려 전기에는 다수의 철불이 조성되었다. 특히 초기에는 촉지인의 석가모니불상이 유행하였는데, 도상은 물론 양식도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본존상을 모본으로 한 듯한 철불이 많다. 이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로부터 정권을 위임받는 당위성에 관심이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고려 태조는 신라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의 상징인 三寶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통일 후 왕권와 나라를 빛나게 하기 위한 불상의 조성은 신라 문화 전성기에 조성되었으며 신라 왕실이 중요시 여긴 석굴암 본존상을 모본으로 조성하였고, 이것이 반복 재생산되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 철불의 제작기법은 제작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외형틀 분할선이 점차 단순해지며, 형지의 수량이 감소한다. 또한 시기나 양식이 비슷할 경우 외형틀 분할 방식도 유사하며, 시대가 뒤로 갈수록 주물이나 주조면이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 도상과 양식적인 특징은 고려 초기에 촉지인의 석가모니불상이 유행하며, 지권인의 상은 고려 초기에 소수 나오고, 다른 도상의 철불은 11세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다. 양식에서 지역적인 특성이나, 장인 집단의 특성이 표출되는 경향은 있으나, 장인이 한 지역에서만 활동하지 않고 불상 조성 장소로 이동하여 철불을 조성하기 때문에 한 양식 체계가 지역을 벗어나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고려 초기에 많은 수량의 철불이 나오고, 고려 중반기 이후 감소한다.
고려시대 철불의 증가와 감소의 흐름은 당시 사회·경제적인 배경과 관련이 깊다. 고려 초, 통일 이후의 국가는 다양한 세력의 전쟁 무기를 관리하여야 했고, 무기 관리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평화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불상이나 사찰 건립과 같은 불교 문화재를 조성하는데 무기였던 철을 사용하였고, 불상을 만들었다. 이러한 철불의 조영은 민심을 수습하고, 무기로 인한 국가 위험요소를 잠재우면서, 새로운 나라와 미래를 홍포하기 위한 효과적이고도 경제적인 수단이었다.
이렇게 다수 조성되던 철불은 고려 후기에는 점차 감소한다. 고려 중기 이후 각종 외침과 鐵所의 붕괴, 귀족의 수탈, 원의 철 공납 요구 등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철 부족 현상을 겪으면서 철불 조성이 어려워졌고, 철불은 감소하였다. 한편 동불의 조성은 오히려 고려 후기에 증가하는데, 12세기 중엽 이후부터 중국은 서서히 지폐를 발행하였고, 특히 元은 銀으로 지불 보증하는 지폐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 고려나 일본으로 들어오는 배에는 당부터 송대에 이르는 다량의 동전들이 실려 있다. 따라서 고려는 주석을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불의 감소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도 관련이 있다. 고려 후기의 지식인인 유학자들은 불상을 금속으로 만드는 일이 불합리한 낭비로 여겼다. 특히 철은 실생활에 가장 밀접한 자원이므로, 조선시대에는 거의 불상을 철로 만들지 않았다.
미술품은 사람의 창조적인 활동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국가, 사회, 경제, 사상, 정치, 문화 체제 속에서 존재하므로, 사람이 만든 미술품이 모든 사회적 경향을 초월하여 탄생할 수 없다. 즉 미술품은 조성되었던 시기의 한 사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철불의 소재인 철은 금속이면서도 가장 일반적이고, 사람의 생활에 가장 밀접하므로, 이를 이용한 만든 철불은 다양한 불교 미술품 안에서도 사회·경제적인 양상을 가장 잘 투영하고 있다.

목차

Ⅰ. 머리말 1
1. 연구 목적 1
2. 연구 현황 3
3. 연구 대상 및 방법 7
Ⅱ. 한국 철불 제작의 시작 11
1. 동아시아 철불의 연원 11
2. 한국의 철불 수용과 전개 20
1) 한국 철불 조성에 관한 학설 검토 20
2) 한국의 철불 수용 배경 25
Ⅲ. 신라 하대 철불 63
1. 신라 하대 철불의 제작기법 64
2. 신라 하대 철불의 도상과 양식 69
1) 왕실 관련 조성 철불 69
2) 왕실 발원 외의 철불 104
3. 신라 하대 사회와 철불 115
1) 왕실의 지방 지배와 철불 조성 115
2) 불교계의 동향과 철불에 대한 인식 변화 123
3) 철불 조성 및 불교 후원 세력의 변화 129
Ⅳ. 고려시대 철불 138
1. 고려 철불의 도상과 양식 140
1) 촉지인 상 141
2) 지권인 상 227
3) 약기인 상 243
4) 묘관찰지인 상 254
5) 설법인 상 257
6) 수인 불명의 상 259
2. 고려 철불의 특징 266
1) 제작기법과 양식의 흐름 266
2) 촉지인 상의 유행 275
3. 고려 철불의 전개 양상과 사회경제적 배경 283
1) 고려 초기 철불의 증가 283
2) 고려시대 제철산업과 철불 287
3) 고려 후기 철불의 감소와 원인 294
Ⅴ. 신라 하대고려 사회에서 철불의 의미 306
Ⅵ. 맺음말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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