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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 자료유형
- 학위논문
- 저자정보
- 지도교수
- 장경희
- 발행연도
- 2022
- 저작권
- 한서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5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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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과 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 지내는 왕실의 사당인 종묘는 나라의 권위를 상징하고 조선의 역사성을 나타낸다. 신위를 모신 신실 내부에는 다양한 의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 주렴은 왕실의 공간을 외부와 분리시키고 심리적·물리적 위계를 차등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왕실의 위엄을 장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종묘 주렴을 대상으로 그 제작 실태와 그것을 만드는 장인의 존재와 국가무형문화재 제 114호 염장을 통해 주렴의 제작기술에 대해 밝혀 보았다.
종묘는 국가의 제사인 종묘제례를 거행하는 장소로 충과 효를 실천하기 위하여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셨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셔야 하는 신주가 증가하여 종묘 신실을 증개축 하여 정전 19실, 영녕전 16실이 되었다. 신실은 국왕마다 1칸씩 배치되었으며, 그곳에 신주를 모실 공간과 제례를 위한 공간을 앞뒤로 마련하였다. 전자에는 신주를 모실 신주장, 어보를 넣는 보장, 어책이나 교명을 넣는 책장, 신주를 기댈 궤를 올려 놓은 신탑을 두고 삼중의 면장으로 구획된다. 후자에는 제상을 놓고, 그 위에 각종 제기를 올려두고 신문 안쪽에는 산개 등을 놓았다.
이처럼 본고에서는 외부와 신실을 구분하여 신성한 공간을 조성하는 주렴을 대상으로 삼아 그 결과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묘의 신실에 걸린 주렴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우선 외주렴은 정전이나 영녕전의 신문 밖에 걸리는 주렴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격렴은 신실 내부 좌우 벽에 걸어 신실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하는 주렴으로 크기는 외주렴보다는 작다. 신렴은 신주를 모시는 신주장에 설치하는 것으로 가장 작았다. 이들 세 종의 주렴은 대나무가 주재료이고 실과 천, 솜, 나무를 사용하여 완성하였다.
그 중 대나무로 발을 엮어 주렴을 제작하는 장인인 주렴장은 시기에 따라 출신지역이나 직역이 변화하였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도감의궤 중 특히『부묘도감의궤』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주렴의 종류와 주렴장을 분석하였다.
17세기의 주렴장은 다양한 지역에서 동원되었으나 점차 서울과 고양 지역에 국한되는 모습을 보였다. 의궤에서 발견된 총 281명의 주렴장은 중 종묘 신실을 수리하는 1방에서 90명이 활동하여 총 32%였다. 18세기의 주렴장은 총 222명이다. 주렴장 대부분 고양지역에서 동원되었으나, 상설관청인 상의원에 소속되기도 하여 관공장의 신분이었다.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종묘 신실을 수리하는 1방에서 74명이 활동하여 전체 27%였다. 19세기의 주렴장은 총 124명이 동원되었으나 어느 지역에서 장인을 동원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전 시기와 달리 10년 이상 장기간 동원된 장인 또한 1명밖에 존재하지 않아 그들의 신분이 사장으로 변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였기 때문인지 동원된 주렴장 중 시상자의 수가 증가하여 20세기 6년간 기록된 총 46명의 대부분이 시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와같이 조선시대 종묘나 궁궐의 주렴을 만들던 장인들은 나라가 망하면서 그 존재가 사라졌고, 해방 이후 주렴을 제작하는 기능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2001년 국가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14호 염장으로 지정하였고 조대용은 보유자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염장은 조선의 주렴장과 달리 민간에서 유행한 세렴 위주로 제작하였으나, 2011년 문화재청에서 종묘의 주렴을 보수하는 사업에 참여하면서 주렴을 재현하면서 그 기술도 전승될 수 있었다.
이처럼 본 연구에서는 부묘도감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종묘의 주렴과 주렴장의 존재를 살펴본 후 현재 지정된 국가무형문화재 제 114호인 염장의 주렴 제작기술까지 밝혀보았다. 이를 통해 종묘의 의물들은 원형대로 재현되고, 그것을 제작하는 기술은 복원 전승되기를 기대해 본다.
종묘는 국가의 제사인 종묘제례를 거행하는 장소로 충과 효를 실천하기 위하여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셨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셔야 하는 신주가 증가하여 종묘 신실을 증개축 하여 정전 19실, 영녕전 16실이 되었다. 신실은 국왕마다 1칸씩 배치되었으며, 그곳에 신주를 모실 공간과 제례를 위한 공간을 앞뒤로 마련하였다. 전자에는 신주를 모실 신주장, 어보를 넣는 보장, 어책이나 교명을 넣는 책장, 신주를 기댈 궤를 올려 놓은 신탑을 두고 삼중의 면장으로 구획된다. 후자에는 제상을 놓고, 그 위에 각종 제기를 올려두고 신문 안쪽에는 산개 등을 놓았다.
이처럼 본고에서는 외부와 신실을 구분하여 신성한 공간을 조성하는 주렴을 대상으로 삼아 그 결과 알게 된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묘의 신실에 걸린 주렴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우선 외주렴은 정전이나 영녕전의 신문 밖에 걸리는 주렴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 격렴은 신실 내부 좌우 벽에 걸어 신실 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하는 주렴으로 크기는 외주렴보다는 작다. 신렴은 신주를 모시는 신주장에 설치하는 것으로 가장 작았다. 이들 세 종의 주렴은 대나무가 주재료이고 실과 천, 솜, 나무를 사용하여 완성하였다.
그 중 대나무로 발을 엮어 주렴을 제작하는 장인인 주렴장은 시기에 따라 출신지역이나 직역이 변화하였다.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도감의궤 중 특히『부묘도감의궤』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주렴의 종류와 주렴장을 분석하였다.
17세기의 주렴장은 다양한 지역에서 동원되었으나 점차 서울과 고양 지역에 국한되는 모습을 보였다. 의궤에서 발견된 총 281명의 주렴장은 중 종묘 신실을 수리하는 1방에서 90명이 활동하여 총 32%였다. 18세기의 주렴장은 총 222명이다. 주렴장 대부분 고양지역에서 동원되었으나, 상설관청인 상의원에 소속되기도 하여 관공장의 신분이었다.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종묘 신실을 수리하는 1방에서 74명이 활동하여 전체 27%였다. 19세기의 주렴장은 총 124명이 동원되었으나 어느 지역에서 장인을 동원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전 시기와 달리 10년 이상 장기간 동원된 장인 또한 1명밖에 존재하지 않아 그들의 신분이 사장으로 변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사적인 생산에 종사하였기 때문인지 동원된 주렴장 중 시상자의 수가 증가하여 20세기 6년간 기록된 총 46명의 대부분이 시상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와같이 조선시대 종묘나 궁궐의 주렴을 만들던 장인들은 나라가 망하면서 그 존재가 사라졌고, 해방 이후 주렴을 제작하는 기능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2001년 국가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14호 염장으로 지정하였고 조대용은 보유자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염장은 조선의 주렴장과 달리 민간에서 유행한 세렴 위주로 제작하였으나, 2011년 문화재청에서 종묘의 주렴을 보수하는 사업에 참여하면서 주렴을 재현하면서 그 기술도 전승될 수 있었다.
이처럼 본 연구에서는 부묘도감의궤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종묘의 주렴과 주렴장의 존재를 살펴본 후 현재 지정된 국가무형문화재 제 114호인 염장의 주렴 제작기술까지 밝혀보았다. 이를 통해 종묘의 의물들은 원형대로 재현되고, 그것을 제작하는 기술은 복원 전승되기를 기대해 본다.
목차
- 목 차표 목 차 ⅱ그림 목차 ⅳ국문 초록 ⅵI. 서론 1I. 조선시대 종묘 신실의 증개축과 의물의 종류 71. 조선시대 종묘 신실의 증개축 72. 종묘 신실 내 의물의 종별 16I. 조선 후기 종묘 주렴의 종류와 제작실태 261. 조선후기 종묘 주렴의 종류와 구조 262. 주렴의 재료 293. 조선 후기 주렴장의 시기별 변천 39I. 염장의 제작 기술 연구 561. 주렴의 제작 재료와 도구 582. 염장의 주렴 제작 기술 64I. 결론 70참고문헌 74Abstract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