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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키워드
본고는 고려전기 대거란전쟁을 전후한 제도 개편 및 국방 정책의 변화를 통해 고려전기 왕도 개경에 대한 방어전략의 실상을 도출해내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에 따라 본고는 국초 개경의 방어력 파악에서 시작하여 대거란전쟁 당시 고려의 대응과 전쟁 이후 성종ㆍ현종 대 제도 개편 및 방어전략의 변화상 파악으로 구성되었다.
開京은 江都 시기를 제외한 436년 8개월 동안 고려의 王都였으며,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교통ㆍ군사의 중심지였다. 국초 고려는 豪族의 할거와 북방 민족의 흥기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대내외 정세 속에 있었다. 그로 인해 태조는 兩界 지역 곳곳에 많은 수의 성곽을 축성하여 북방 민족을 견제함과 동시에 왕도 개경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개경은 勃禦槧城 외에 별도의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지방의 호족세력과 민심이 개경을 중심으로 일원화되지 않은 결과였다.
국초 개경은 방어시설의 부재로 인해 방어력이 낮았다. 이를 보완한 것이 발어참성 주변의 하천과 개경 일대에 창건된 寺刹이었다. 발어참성 주변의 하천은 발어참성의 동쪽과 남쪽에서 흐르면서 垓字의 기능을 하였다. 개경 일대 사찰의 경우, 창건 이후 사찰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왕래함에 따라 자연스레 사찰을 중심으로 도시구조가 형성되면서 전략적 요충지ㆍ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 또는 주변 지역에 넓은 부지가 존재하여 군대의 閱兵이나 駐屯이 가능하였다. 興王寺를 비롯한 일부 사찰은 성곽과 같은 방어시설을 갖추어 요새의 기능을 하였다.
고려전기의 개경 방어전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成宗 代 對거란전쟁이 끝난 이후이다. 대거란전쟁 이후 성종은 兩界 지역의 성곽을 築城ㆍ修築하여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양계 지역의 교통로를 6科體制로 편성하여 驛路網의 안정적인 운영을 보장함과 동시에 驛路를 통해 중요 거점을 연결하였다. 각 주진은 역로를 기반으로 유사시 군수물자 및 지원군의 원활한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개경 이북 방어망이 구축되었다.
개경 이북 방어망은 顯宗 代 대거란전쟁 당시 거란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거란의 배후를 타격 및 교란하는 등 어느 정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거란에 의해 왕도 개경이 함락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개경 이북 방어망의 정비ㆍ보완 및 새로운 방어전략 수립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양계 지역의 성곽 축성 및 수축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결정적으로 개경에 羅城이 축조되었다. 이를 통해 개경 방어전략은 나성 중심 방어체계와 개경 이북 방어망으로 확립되었다.
나성 중심 방어체계와 개경 이북 방어망은 역로로 연결되어 운용되었다. 외적이 국경을 넘어 침입하면 개경 이북 방어망에서 외적의 진군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동안, 역로를 통해 외적의 침입 사실과 진군 현황이 개경으로 전달되었다. 외적이 개경 근방에 이르렀을 경우, 개경에 戒嚴을 내려 개경 내 군사행정적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개경 내의 인적ㆍ물적 자원을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후 군대를 나성 밖으로 파견, 외적이 나성까지 접근하는 것을 외곽에서 차단함으로써 개경을 방어하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확립된 고려전기 개경 방어전략은 이후 고려의 기본적인 왕도 방어전략으로 활용되었으며, 강도 시기에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고려는 왕도 개경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현종 이후 거란의 침공 및 몽고의 1차 침입 당시에 개경이 함락되지 않았던 것은 현종 대에 확립된 개경 방어전략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결과였다.
開京은 江都 시기를 제외한 436년 8개월 동안 고려의 王都였으며,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교통ㆍ군사의 중심지였다. 국초 고려는 豪族의 할거와 북방 민족의 흥기 등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대내외 정세 속에 있었다. 그로 인해 태조는 兩界 지역 곳곳에 많은 수의 성곽을 축성하여 북방 민족을 견제함과 동시에 왕도 개경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반면에 개경은 勃禦槧城 외에 별도의 방어시설을 갖추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지방의 호족세력과 민심이 개경을 중심으로 일원화되지 않은 결과였다.
국초 개경은 방어시설의 부재로 인해 방어력이 낮았다. 이를 보완한 것이 발어참성 주변의 하천과 개경 일대에 창건된 寺刹이었다. 발어참성 주변의 하천은 발어참성의 동쪽과 남쪽에서 흐르면서 垓字의 기능을 하였다. 개경 일대 사찰의 경우, 창건 이후 사찰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왕래함에 따라 자연스레 사찰을 중심으로 도시구조가 형성되면서 전략적 요충지ㆍ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 또는 주변 지역에 넓은 부지가 존재하여 군대의 閱兵이나 駐屯이 가능하였다. 興王寺를 비롯한 일부 사찰은 성곽과 같은 방어시설을 갖추어 요새의 기능을 하였다.
고려전기의 개경 방어전략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成宗 代 對거란전쟁이 끝난 이후이다. 대거란전쟁 이후 성종은 兩界 지역의 성곽을 築城ㆍ修築하여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양계 지역의 교통로를 6科體制로 편성하여 驛路網의 안정적인 운영을 보장함과 동시에 驛路를 통해 중요 거점을 연결하였다. 각 주진은 역로를 기반으로 유사시 군수물자 및 지원군의 원활한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개경 이북 방어망이 구축되었다.
개경 이북 방어망은 顯宗 代 대거란전쟁 당시 거란의 진군을 지연시키고, 거란의 배후를 타격 및 교란하는 등 어느 정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거란에 의해 왕도 개경이 함락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개경 이북 방어망의 정비ㆍ보완 및 새로운 방어전략 수립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양계 지역의 성곽 축성 및 수축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결정적으로 개경에 羅城이 축조되었다. 이를 통해 개경 방어전략은 나성 중심 방어체계와 개경 이북 방어망으로 확립되었다.
나성 중심 방어체계와 개경 이북 방어망은 역로로 연결되어 운용되었다. 외적이 국경을 넘어 침입하면 개경 이북 방어망에서 외적의 진군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동안, 역로를 통해 외적의 침입 사실과 진군 현황이 개경으로 전달되었다. 외적이 개경 근방에 이르렀을 경우, 개경에 戒嚴을 내려 개경 내 군사행정적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개경 내의 인적ㆍ물적 자원을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후 군대를 나성 밖으로 파견, 외적이 나성까지 접근하는 것을 외곽에서 차단함으로써 개경을 방어하였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확립된 고려전기 개경 방어전략은 이후 고려의 기본적인 왕도 방어전략으로 활용되었으며, 강도 시기에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고려는 왕도 개경의 안전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게 되었다. 현종 이후 거란의 침공 및 몽고의 1차 침입 당시에 개경이 함락되지 않았던 것은 현종 대에 확립된 개경 방어전략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결과였다.
목차
- Ⅰ. 서 론 1Ⅱ. 太祖ㆍ光宗 代 개경의 건설과 군사시설 6Ⅲ. 成宗 代 對거란전쟁과 개경 이북 방어망의 구축 191. 成宗 代 對거란전쟁의 전개와 결과 192. 서북계 지역의 축성과 개경 이북 방어망의 구축 22Ⅳ. 顯宗 代 對거란전쟁과 개경 방어전략의 확립 361. 顯宗 代 對거란전쟁의 전개와 결과 362. 羅城의 축조와 개경 방어전략의 확립 39Ⅴ. 결 론 50참고문헌 54Abstract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