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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오영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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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목민관 활동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목민서 『칠사고(七事考)』를 고찰하여 18세기말 당시의 목민관이 향촌사회에서 직면한 문제들과 그에 대응하는 목민관의 고민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다.
박지원(1737~1805)은 반남 박씨 노론 명문가 출신이고, 호는 연암이다. 젊은 시절 소위 9전(傳)의 소설을 지어 부패한 양반 사회를 비판하였다. 1778년 이후로는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에 거주하면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법을 연구하였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단의 단장으로 임명된 삼종형(三從兄) 박명원을 따라 연경을 거쳐 열하까지 다녀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작성하였다. 노년에 해당하는 1791년부터 음직으로 환로(宦路)에 올라 안의현감, 면천군수, 양양부사를 재임하였다.
연암은 안의현감(1791)에 임명되어 안의현에서 아전들의 포흠(逋欠)문제를 해결하였다. 당시 안의현은 아전들의 포흠이 심하였는데 연암은 단순 처벌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처벌이 아닌 다른 방식을 택하였다. 연암은 포흠문제의 핵심을 포흠된 곡식으로 보고, 이를 갚는 것이야말로 문제의 해결이라 파악했다. 그러므로 연암은 우선 아전들을 설득해 자수하게 하여 정상참작(情狀參酌)의 여지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관인 경상감사를 설득하여 문제의 처리를 위임받았다. 그 후 안의현 구성원들을 모아 설득의 과정을 거쳐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갚게 하였다.
이후 연암은 면천군수(1797)로 부임하여 당시 면천군에 만연하던 사학(邪學=천주교)문제를 해결하였다. 당시 면천을 포함한 내포지역에는 정사박해가 있었는데 다른 수령들은 천주교가 왜 사학인지 몰라 천주교도를 체포하여도 힐문(詰問)할 근거가 없었기에 형벌을 사용하여 자백받던 실정이었다. 그러나 사학도들은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순교를 자처했다. 때문에 연암은 단순 형벌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연암은 먼저 부모의 천륜(天倫)과 은혜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후 천주교가 사학인 이유로 천륜과 윤리를 거스르기 때문임을 알려주는 설득의 과정을 거쳐 그들을 교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연암은 이러한 안의현과 면천군에서의 목민활동에서 직면한 문제들 때문에 목민의 원칙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칠사고』를 저술하였다. 『칠사고』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수령칠사(守令七事)’에서 나온 이름으로 ‘수령이 해야 할 일을 고찰한 서적’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연암이 『목민고(牧民考)』와『임관정요(臨官政要)』등을 읽으면서 목민 관련 사항을 간추리고 본인의 목민 경험을 반영하여 작성한 것이다. 연암은 향후 지방관의 목민활동 지침서가 될 것을 염두하여 『칠사고』을 작성하였으나 유포되지 못하였고, 다른 목민서와 비교할 때 독립적인 목민서로 완성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간활식(姦猾息) 등의 수령칠사의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되던 시대적, 지역적 상황을 반영하여 그 대응법을 마련하고자 했던 시도라는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칠사고』의 특징은 첫째 백성들에게 동요를 주지 않는 것, 둘째 너그러움과 엄격함의 조화를 갖추어 중용을 이루는 것, 셋째 교화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각각 안민(安民), 중용(中庸), 교화(敎化)로 정리될 수 있으며, 이 셋을 통해 조선후기 당시 목민관의 현실적인 고민은 각종 갈등을 조정(調停)하여 악화를 막고 향촌 질서를 최대한 유지하는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칠사고」는 주로 『목민고』를 초록하였으므로 18세기 조선후기 목민서의 계보에서 ‘목민고류’의 목민서로 분류해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 『칠사고』는 그 내용상으로는 ‘선각류’의 목민서와 유사한 관점을 가져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또한, 「칠사고」는 18세기말 노론 출신 북학파의 목민서로서 이후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같은 19세기초 개인 저술 목민서로 이어지는 중간 단계의 목민서이자, 소론계 문인의 『목민고』와 남인계 안정복의 『임관정요』를 절충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암이 활동했던 18세기는 국왕 정조의 지방정책과 법치주의 정비를 통한 대민의식의 제고가 어느 시대보다도 표출되고 있었다. 이에 연암을 포함한 목민관은 지방과 민을 중시하는 국가의 기조를 따라 군현지배에 나섰고 ‘읍세민정(邑勢民情)’을 감안한 운영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중세해체기인 18세기 당시 목민관들에게는 현재 상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고 향촌사회를 유지할 것인지가 관건이었고 목민에 있어서 주요한 고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실학을 비롯한 개혁안은 당대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지만 이러한 개혁안은 현장과는 거리가 있는 정론가(政論家)로서의 입장일 뿐이었으며 실제 민들과 대면하는 목민관(牧民官)의 입장에서 중요했던 것은 최대한 향촌의 동요를 막고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연암은 사학도(천주교도)와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칠사고』에 이들을 교화시키는 내용의 사학조(邪學條)를 쓴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교화의 과정에서 사학도를 처벌이 아닌 설득을 통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 외에도 연암이 안의현감 시절 포흠했던 아전들을 설득하고 처벌없이 그들이 포흠했던 곡식을 갚게 하여 문제를 해결했던 점 등 ‘수토지신(守土之臣)’으로서 목민관의 위상을 견지(堅持)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진정한 목민관인 연암의 모습에서 미뤄 볼 때 목민관의 핵심은 조선왕조가 강조하던 지방지배원칙을 유지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목차

  1. 표 차례 ․․․․․․․․․․․․․․․․․․․․․․․․․․․․․․․․ ii
    그림 차례 ․․․․․․․․․․․․․․․․․․․․․․․․․․․․․․․ ii
    국문 요약․․․․․․․․․․․․․․․․․․․․․․․․․․․․․․․ iii
    1. 서론․․․․․․․․․․․․․․․․․․․․․․․․․․․․․․․․․ 1
    2. 조선후기 지방지배와 목민관․․․․․․․․․․․․․․․․․․․․․․ 8
    1) 조선후기 지방제도와 목민관․․․․․․․․․․․․․․․․․․․․․ 8
    2) 영·정조시기 지방정책과 박지원의 학문활동․․․․․․․․․․․․․․ 12
    3. 박지원의 목민활동과 지방대책․․․․․․․․․․․․․․․․․․․․․ 21
    1) 안의현감 수행과 이서책․․․․․․․․․․․․․․․․․․․․․․․ 22
    2) 면천군수 수행과 서학대응․․․․․․․․․․․․․․․․․․․․․․ 40
    3) 양양부사 수행과 황장목활용․․․․․․․․․․․․․․․․․․․․ 54
    4. 목민서『칠사고』의 저술과 특징․․․․․․․․․․․․․․․․․․․ 63
    1) 『칠사고』의 구성과 특징․․․․․․․․․․․․․․․․․․․․․․ 63
    2) 『칠사고』의 조선후기 목민서로서의 의의․․․․․․․․․․․․․․ 92
    5. 결론․․․․․․․․․․․․․․․․․․․․․․․․․․․․․․․․ 99
    참고 문헌․․․․․․․․․․․․․․․․․․․․․․․․․․․․․․․103
    ABSTRACT․․․․․․․․․․․․․․․․․․․․․․․․․․․․․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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