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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영남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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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키워드

    李德裕는 황제조차 긴장할 정도로 권력을 행사했던 權臣이었다. 李德裕에 대한 평가는 그의 개인적 능력과 붕당 영수의 면모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따라서 李德裕가 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과 의미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했다.
    文宗은 즉위 초반부터 환관의 전횡과 당쟁의 해결에 政務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를 위하여 文宗은 宋申錫, 賈餗, 舒元輿와 같은 중립적 성향의 관료를 발탁했다. 文宗은 그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기존의 관료집단과 환관집단에 대한 견제 혹은 제거를 시도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政局을 장악하고 주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文宗의 시도는 甘露之變으로 인해 실패했다.
    감로지변 이후에도 文宗은 기본적으로 대리인을 활용하는 방식을 유지했다. 그러나 仇士良을 필두로 한 환관집단의 반발과 재상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文宗의 정무 운영은 차질을 빚었다. 결국 文宗의 시도는 그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뒤를 이은 武宗은 새로운 인물을 발탁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李德裕였다.
    李德裕는 관료에게 일체 권한을 부여하고 그 기반이 동요하지 않도록 황제가 지지를 해주면 정치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武宗은 李德裕에게 정무의 전반을 위임했다. 武宗은 文宗의 대리인을 활용하는 방식을 채용하면서도, 李德裕에게 전적으로 권한을 위임하여 정국을 주도하고자 했다.
    李德裕는 환관 仇士良과 대립했다. 仇士良도 武宗의 신임을 받던 李德裕를 경계했다. 李德裕와 仇士良의 모순이 명확히 드러난 사건이 丹鳳樓사건이었다. 당시 사면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禁軍에 지급하는 물자의 삭감 소문이 퍼졌다. 자신의 영향력 축소를 우려한 仇士良은 무력시위까지 감수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자 李德裕는 仇士良의 반응을 武宗에게 알렸다. 무종은 李德裕의 편을 들어주며 仇士良을 질책했다. 武宗의 강경한 태도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文宗과는 대비됐다. 丹鳳樓사건 이후 仇士良은 사임했고, 두 달 후에 사망했다. 武宗의 보호를 통해 李德裕는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났다.
    李德裕는 楊欽義 등 여타 환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그를 바탕으로 楊欽義 등의 협조를 얻어 仇士良을 축출했다. 환관집단과의 관계가 안정된 이후에는 관료집단을 정리하여, 李宗閔, 牛僧孺를 좌천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李德裕는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840년, 黠戞斯에 의해 붕괴한 回鶻의 유민들이 唐의 북방으로 남하해왔다. 回鶻遺民에 대한 토벌 여부를 둘러싸고 李德裕와 여타 관료들의 의견은 상충했다. 李德裕는 신속한 토벌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했고, 武宗은 꾸준히 李德裕의 의견을 지지했다. 回鶻에 대한 토벌은 李德裕의 의견대로 843년 1월에 진행됐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回鶻 토벌이 진행되는 3년간 唐朝의 군사 활동을 주도한 사람은 李德裕였다.
    843년 4월에는 절도사 세습 문제로 중앙 조정과 대립하던 澤潞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澤潞의 세습을 인정하자는 여론이 형성됐지만 李德裕는 강경 대응을 주장했다. 武宗은 李德裕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澤潞에 대한 토벌이 진행됐다. 澤潞 토벌에서도 李德裕는 군사 활동 전반을 주도했다. 그의 주도 하에 澤潞의 반란도 성공리에 진압했다. 李德裕는 군사 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太尉에 임명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李德裕는 강한 권력을 소유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광범위한 개혁 조치를 시행할 수 있었다. 황제 武宗은 사망할 때까지 李德裕에 대한 신임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武宗이 사망하고 宣宗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宣宗은 叔姪 계승이라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조정에 대한 자신의 장악력을 제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宣宗은 자신이 직접 주도하는 형태의 정국 운용을 관철했다. 이와 같은 宣宗의 정국 운영 방식에서 李德裕라는 권신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李德裕와 같은 권신은 宣宗의 치세에서 등장하지 못했다.
    李德裕는 武宗의 신임을 기반으로 정국을 주도했다. 武宗은 李德裕를 활용하여 국정 운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武宗의 李德裕 발탁은 唐 후반기 황제가 관료를 활용해 정국 주도권 장악에 성공한 사례로써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1. Ⅰ. 서 론 1
      Ⅱ. 文宗 시기(827-840)의 정치적 상황 6
      1. 太和 연간(827-835)의 당쟁과 환관 6
      2. 甘露之變 이후 文宗의 국정 운영 11
      Ⅲ. 武宗 시기(840-846) 李德裕의 권력 확대와 政局 주도 19
      1. 宰相 임명과 지위의 안정 19
      2. 권한의 집중과 정치적 활동의 강화 28
      Ⅳ. 宣宗 시기(846-859) 李德裕의 실각과 국면 전환 40
      1. 宣宗의 즉위와 李德裕의 貶職 40
      2. 大中 연간(847-859)의 政局 변화 43
      Ⅴ. 결 론 49
      참고문헌 52
      Abstract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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