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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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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동아인문학 제7집
발행연도
2005.6
수록면
53 - 81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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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의병은 조선에서 최초로 궐기한 항일의병이었다. 그것은 그의 스승인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결과였다. 그러나 곽재우가 궐기한 의병이 처음부터 순조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첫째는 전통적인 통치기구의 붕괴와 사회의 혼란에 의해 반사회적 행동을 취하는 민중의 이반이었으며, 둘째는 곽재의 궐기를 의병으로 인정하지 아니한 관군 지휘관들과의 대립이었다. 전자는 곽재우가 궐기한 군사가 의병이라는 사실을 향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함과 동시에 반란자나 왜군에 부역하는 자는 엄하게 처벌함으로써 극복했으며, 후자는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의 대립이었는데 남명 조식 문하 경상우도 의병장들의 지지와 초유사 김성일의 중재에 의하여 화해함으로써 정식 의병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경상우도 의령을 본진으로 하여 남강에서부터 낙동강 연안지역을 그들의 전투범위로 삼았으며, 항전 상대는 경상도 통치를 담당한 모오리 데루모토, 상경 우로에 주둔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가츠군 등이었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과의 학연을 통해 경상우도 의병장들과 제휴하여 용감히 싸웠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경상우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도 민중을 일본군으로부터 보호했으며, 일본군의 조선통치를 정지시켰다.
그는 전략전술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두 번의 진주성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것은 그러한 예였다. 그리하여 일본군들은 경상도 의병활동을 최대의 장애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히데요시는 1592년의 입명(入明)계획을 영원히 실현하지 못했다. 곽재우가 육지전에서 세운 전공은 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의 전공과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그는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전투를 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승전소식을 조정에 보고하지 아니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와 평민으로 일생을 마무리 하였다.

목차

Ⅰ. はじめに
Ⅱ. 人格形成期と南冥曹植
Ⅲ. 義兵活動
Ⅳ. おわりに-歷史的意義
【參考文獻】
〈한국어 초록〉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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