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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49號
발행연도
2006.3
수록면
113 - 139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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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석물은 조선시대 조각사를 대표하는 수준 높고 격조 있는 조각이며,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조각품이다. 조선시대 왕릉 석물들은 국가왕실의 조직적 주도 아래 당대의 솜씨 있는 畵員과 장인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응집하여 역량을 발휘한, 당대 문화의 정수이다. 특히 조선후기는 왕릉 석물 제작에 따른 일체의 작업과정을 기록한 山陵都監義軌가 현전하여 제작연대를 추정할 수 있어 미술사연구의 주요 편년자료가 된다.
조선후기 왕릉 석물 설치의 문헌상 기준이 된 것은 『國朝續五禮儀』(1744)와 『續大典』(1746)이다. 또한『國朝喪禮補編』(1752)과 『春官通考』(1787) 등에는 문무인석 圖說이 등장하여 문헌상의 규정을 알 수 있고, 의궤에서는 『顯隆園園所都監儀軌』(1789), 健陵山陵都監儀軌』(1800) 등에서 각종 석물의 도설과 규격 등을 제시하고 있다.
왕릉 석물의 밑그림은 대부석소 소속의 회원이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起畵’ 제작단계에서 석물의 도상과 종류, 형태, 치수 등의 밑그림과 마무리단계에서의 후일에 참고로 삼기 위해 만드는 의궤의 도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1789년 『현륭원산릉도감의궤』의 석인 도설은 화원 ‘許?’이 그린 것으로 보이고, 正祖健陵山陵都監(1800)에는 화원 金應洙가, 文祖綏陵山陵都監 (1846)에는 화원 劉運弘이 참여하여 도설을 그런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건릉과 수릉의 석인은 도설과 매우 유사하여 18-19세기에 이르면 석물제작에 있어서 대부석소 소속 화원의 역할이 점점 증대됨을 알 수 있다.
산릉도감의궤에 의하면 조선후기 왕릉 석물을 조각한 장인은 ‘石手’이고, 그 석수의 우두머리는 ‘邊手’라고 불렀다. 석수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변수 그룹은 17세기 중반-18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李希善, 李景立, 崔天男 그룹이다. 이들이 만든 왕릉 석물은 寧陵(1674), 崇陵(1675), 翼陸(1680), 徽陸(1688) 등인데 이들은 매우 웅장하고 장대한 특정을 지니고 있다. 1701년 인현왕후 明陵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석물의 간소화 경향이 짙어지는데, 이전의 장대하고 단순한 석물을 보다 정교하고 자유스러운 표현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18세기 중반의 朴弼心, 崔萬成 변수 그룹은 弘陵(1757)과 인원왕후 明陵(1757)의 석인을 만들었다. 이후 18세기 金大輝, 鄭有福 석수 그룹은 왕릉에서는 처음으로 양관조복을 갖춘 문인석이 등장하고, 양당식 갑옷 및 삼지창형투구 등 현실의 복식을 반영한 석인이 등장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후기 왕릉 석물의 문헌규정과 석물의 배치
Ⅲ. 조선후기 왕릉의 ‘石手’와 ‘起畵’
Ⅳ. 조선후기 왕릉 석인의 미술사적 특징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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