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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1
발행연도
2008.9
수록면
233 - 279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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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창의 반란 사건은 신라사의 전개 과정에서 지닌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별로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대개 하대의 政治過程을 다루면서 극히 부분적으로만 취급되었을 따름이다.
난이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어도 國號를 따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신라왕조를 그대로 이어가지는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는 난의 주도 세력이 신라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점을 제대로 인지하고 그를 革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에 소멸되어 버린 독자적 年號 사용의 관행을 되살리려 하였다는 점도 그와 관련하여 깊이 吟味해 보아야 할 대상이라 하겠다. 이는 기존의 신라왕조와는 달리 강한 자주성을 지닌 새로운 성격의 국가 건설을 표방하고 있음을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王京 출신의 유력한 귀족이 地方長官으로서 지방민을 규합하여 도모하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어쩌면 뒤이은 軍鎭勢力 張保皐의 등장 징후가 이미 여기에서 나타나며 나아가 먼 훗날 後三國 鼎立의 한 端初도 이 난에서 읽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김헌창의 난을 실마리로 이제 정치적ㆍ사회적인 무게 중심이 점차 지방으로 옮겨지는 현상을 더듬을 수도 있다. 이는 지방이 그만큼 정치적ㆍ사회적으로 크게 주목받을 만큼 두드러지게 성장하였음을 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김헌창의 난과 관련 사료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그 원인과 배경, 참여범위 경과 등을 새롭게 살펴보고 나아가 그를 토대로 성격과 영향을 구체적으로 밝혀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난이 수습된 이후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신라사회의 모순구조를 해소하고자 하였으나 그것은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치유책은 되지 못하였다. 그나마 신라사회가 100여년 더 지속되게 된 것은 어쩌면 김헌창 난 덕분일지도 모른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背景과 原因
Ⅲ. 參加範圍와 經過
Ⅳ. 亂의 性格
Ⅴ. 事後處理와 그 影響
Ⅵ.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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