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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藏書閣 제18집
발행연도
2007.12
수록면
89 - 162 (7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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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유학자 尤庵 宋時烈(1607-89)은 효종연간의 北伐論을 이끌었던 인물 이다. 본고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華陽洞 계곡에 남아있는 우암 관련 事蹟을 통해 17세기 지성의 일면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에 우암의 은거와 관련하여 그가 열렬히 추종했던 南宋 朱熹의 은거와 武夷九曲, 조선 문사의 구곡 경영을 알아보고, 이어 우암의 華陽洞 은거와 精舍의 明皇御筆의 모각과 珍藏, 華陽書院의 개창과 ,萬東廟의 설립, 華陽九曲의 命名과 전파 등 우암의 은거 사상 및 그 전파양상을 살펴보았다.
朱熹(1130-1200)는 북쪽 여진족 金의 침공에 따라 남쪽 臨安으로 옮겨간 남송 정부가 金에 대해 나약한 태도로 일관하자, 출사를 거부하고 福建省 武夷山에 은거하여 精舍를 짓고 講學에 열중했으며, 또 주위의 勝景을 九曲으로 명명하며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심회를 풀어냈다. 이러한 주회의 행적은 조선시대 문사들에게 은거와 강학의 모범적 선례가 되어 여러 추종양상을 낳았다. 특히 17세기 明淸交替期를 겪었던 우암은 淸에 대한 復?雪恥의 기치 아래 효종과 벌였던 北伐 수포로 돌아가자, 화양동에 들어가 巖樓濟라는 정사를 짓고 북벌의 의지를 전환시켜 주위 산천을 여러 상징물로 시각화함으로써 화양동을 性理學的 은거와 大明義理의 관념을 융화시킨 장소로 만들어갔다. 특히 閔鼎重이 구해온 〈非禮不動〉이란 毅宗御筆을 얻게 되자 이를 화양동의 瞻星臺 암벽에 모각하고 明 神宗과 毅宗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하는 등 尊周大義의 이상을 실천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우암이 사망한 뒤 權尙夏(1641-1721)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우암의 은거사상과 대명의리를 진전시켜 갔는데,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明 萬曆帝 神宗과 의롭게 순절한 마지막 황제 崇禎帝 毅宗을 제사하는 萬東廟를 세우고, 스승 우암을 제향하는 華陽書院을 세워 우암 사상을 계승하는 등 조선이 明을 이어 중화를 지켜간다는 ‘小中華主義’의 신념을 실천하였다. 또 그들은 華陽九曲의 명칭을 정착시키면서 우암의 화양동을 조선 문사의 대표적 隱居講學處로서 주희의 무이산과 동일시하며 널리 전파시켜갔다.
이러한 우암과 그를 계승한 이들의 행적은 은거와 강학이란 性理學的 관념과 義理에 기초한 中國觀을 결부시킴으로써 조선시대 九曲 은거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지나친 崇明主義로 인해 결국 慕華的 관념에 경도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하겠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武夷九曲과 朝鮮文士의 九曲
3. 우암의 華陽洞 은거와 事蹟
4. 우암 사상의 계승과 전파
5. 맺음말
[Abstract]
[도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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