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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정신문화연구 2006 여름호 제29권 제2호 (통권 103호)
발행연도
2006.6
수록면
367 - 388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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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行路 상에 있는 봉황산의 동쪽 자락에는 아직까지 고구려의 옛 성이 남아있다. 이 성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벽의 둘레는 7,525m에 달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고구려의 烏骨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성이 745년 양만춘 장군이 唐의 대군을 물리친 安市城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 사신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 안시성설은 18세기 이후 사회의 통설이 되었다. 물론 역사지리학의 토대 위에서 이 안시성설을 부정하는 반론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렇게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의 공간에 깊은 역사적 유서가 깃들게 된 현상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4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기 여러 가지 역사 조건을 고려한 결과, 이러한 현상에는 ① 唐太宗이 봉황산성에서 위기에 빠졌다는 薛仁貴 영웅담의 내용, ② 안시성주 양만춘이 唐軍의 파상 공격을 격퇴했다는 『唐書演義』의 내용, ③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이켰다는 역사기록의 내용, ④ 고구려의 옛말에 봉황을 ‘안시’ 또는 ‘아시’라고 했다는 전승, ⑤ 문화적으로 야만시하던 淸나라에 눌려있는 역사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음을 규명하였다. 이 글의 논의는 안시성의 위치를 비정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복잡한 역사 환경 속에서 역사 인식이 형성되고 변모하는 양상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목차

Ⅰ. 문제제기
Ⅱ. 요동반도에서의 안시성론
Ⅲ. 봉황산성의 고구려 도읍지설
Ⅳ. 봉황산성의 안시성설
Ⅴ. 봉황산성의 안시성설에 대한 반론
Ⅵ.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English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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