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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학회 한국민속학 韓國民俗學 第50輯
발행연도
2009.11
수록면
513 - 575 (6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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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면극은 그 내용과 성립과정으로 보아 크게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으로 나눌 수 있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은 자생적 가면극이다. 우리의 자생적 연희의 흔적은 이미 상고시대의 암각화와 국중대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황창무, 『삼국유사』『처용랑 망해사 조의 남산신 가면무와 처용무 등 자생적 가면무도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의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들은 다른 지방의 가면극과 전혀 다른 내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 가면극들이 마을굿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본산대놀이는 삼국시대에 유입된 산악ㆍ백희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해, 18세기에 성균관 노비였던 반인들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백희, 잡희, 산대희, 산대잡희라고 칭해졌던 연희는 바로 서역과 중국에서 유입된 산악ㆍ백희 계통의 연희이다.
아극돈의 『봉사도』(1725) 중 제7폭에서는 당시의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 소형산대 앞에서 대접돌리기, 물구나무서기, 줄타기와 함께 가면을 쓴 네 사람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미 1725년 이전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가면희도 행했으며, 서울 근교의 가면극을 산대놀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권1 성기 조에서는 나례도감에 속했던 연극인 야희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18세기 중엽에 본산대놀이가 성립되어 있었거나, 성립되어 가고 있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산악ㆍ백희로부터 가면극으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또 강이천의 한시 〈남성관희자〉(1789)는 이미 1778년에 지금과 같은 내용의 본산대놀이가 성립되어 있었음을 전해 준다. 본산대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근교의 가면극은 애오개(아현), 사직골, 구파발, 녹번 등에 있었다. 본산대놀이의 영향 아래 서울과 경기도의 송파산대놀이ㆍ양주별산대놀이, 황해도의 봉산탈춤ㆍ강령탈춤ㆍ은율탈춤, 경남의 수영야류ㆍ동래야류ㆍ통영오광대ㆍ고성오광대ㆍ가산오광대, 남사당패의 덧뵈기 등이 생겨났다.
가면극의 많은 대목들은 독립적인 우희(優戱)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본산대놀이의 형성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을 터이지만, 대사의 구성이나 양반과장 중 양반의 모습 등은 우희ㆍ유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우희는 산악ㆍ백희의 한 종목이었다. 그러므로 산악ㆍ백희 계통의 연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산대놀이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들과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해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또 각 지역으로 전파된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들도 계속 독자적 변모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목차

[국문 초록]
Ⅰ. 머리말
Ⅱ. 마을굿놀이 계통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Ⅲ.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역사적 전개
Ⅳ. 결론
도판목록
참고문헌
[부록]

참고문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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