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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재원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3호
발행연도
2010.9
수록면
133 - 16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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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선천에서 발생한 기독교 관계 시국사건인 선천사건에 관한 것이다. 선천사건은 1920년 9월 발생한 경찰서 폭파사건이 발단이 되어 선천 기독교계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진 사건으로, 서북지방 기독교계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통제 사례였다.
3ㆍ1운동에 대한 무력탄압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던 일제는 그 동안 경계 대상이었던 기독교계에 대해서도 유화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3ㆍ1운동 이후 서북지방에서는 기독교계 조직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연통제를 통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이 시기 서북지방에서는 무장활동도 잇따르면서, 일제의 서북지방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서북지방에 대한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던 1920년 9월, 선천에서 경찰서 폭파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본래 대한광복군총영이 8월에 있었던 미국 의원단의 방한을 노린 의열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사건의 주동자 가운데 박치의라는 선천 기독교인이 있었던 사실을 구실로 삼아, 폭파사건을 선천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한 테러활동으로 확대하였다.
이 선천사건의 원인으로는 우선 선천이 지닌 기독교적 성향과 항일운동의 전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바로 기독교 교세가 강한 서북지방 가운데서도 선천은 대표적인 기독교 강세 지역이었다. 특히 선천 기독교계는 그동안 105인사건을 비롯해 3ㆍ1운동에도 연관되면서 일제의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결국 일제는 폭파사건을 구실로 선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물론, 선천을 본보기로 삼아 서북지방 기독교와 항일운동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에 선천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부분 선천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었다. 이들 대부분은 3ㆍ1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었고, 기타 항일운동에도 연관되었던 것이 특징이다. 경찰은 조작수사를 통해 선천 기독교 인사들을 폭파사건에 철저히 연루시켰고, 경찰의 수사결과를 토대로 진행된 재판에서 관련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여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선천사건에 대한 재판결과는 평양 등 다른 지역의 사건과 비교해도 분명 과중한 처벌이었다.
선천사건 이후 선천 기독교계는 교세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항일운동에서는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이전과 같이 기독교계가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양상이 1920년대 이후로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 강세 지역으로 유명했던 특성 상,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기독교계의 위축이 선천 사회전반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목차

1. 머리말
2. 선천사건의 발생과 배경
3. 선천사건 관련자들과 일제의 사건 확대ㆍ조작
4. 선천사건의 처리문제와 영향
5.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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