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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32호
발행연도
2008.8
수록면
95 - 142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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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1328~1396)의 문집인 『牧隱集』(『牧隱詩藁』와 『牧隱文藁』)은 지금 까지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문집 중 분량이 가장 많다. 그런 만큼 역사 연구에서 좋은 자료가 되지만, 문집의 시문들은 일반 史書와 그 활용 방법을 달리해야만 한다. 사서가 저술된 시점에서 저자의 인식을 종합적으로 보여 주는 데 비하여, 문집의 시문들은 긴 시간에 걸쳐 지어졌을 뿐 아니라, 그때그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집의 시문들을 사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 연보를 만들어 각 작품이 지어진 시점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시문들은 정치사, 사상사 등에 대한 거시적인 연구보다는 일상사에 대한 미시적 연구에 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논문은 『목은시고』의 시문 가운데 1379년에 지어진 981題의 시를 이용하여 그 한 해 동안 이색의 일상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우선, 相避親을 기준으로 하여 兩側的 親屬 범위의 친족들을 가족재구성[Family Reconstruction]의 방법으로 조사하였다. 그 결과 1379년 당시 이색의 本族과 外族은 물론, 妻族도 그다지 번성한 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1379년 한 해 동안 이색의 정치 활동을 조사하여, 그가 1371년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았으며, 1379년 10월에 복직되었지만 몇 개월 만에 다시 물러났음을 밝혔다. 이것이 곧 당시 이색의 정치ㆍ사회적 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79년에 이색은 52세의 노인이었고, 부인 권씨와 장남 이종덕 부부, 그리고 어린 손자들과 함께 개경 묘각동의 집에서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韓山君으로서 녹봉을 지급받았으며, 고향인 한산과 면주에 있는 토지, 1363년에 지급받은 공신전, 부인 권씨의 재산 등으로 생활하였다. 특히 1378년에는 여주 천녕현의 토지를 사전으로 지급받았고, 그밖에 다른 사람들에게 글을 지어주고 받은 사례금이 이 시기 이색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이색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시를 짓는 일이었다. 그밖에 집안일로는 각종 제사에 참석하는 일이 중요했는데, 1379년 한 해 동안 어머니와 처부, 처조부, 처조모, 처외조모의 기재에 참석하였다. 주로 처가의 제사에 참석했고, 본가와 외가의 제사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주목되었다.
마지막으로, 1379년 한 해 동안 이색의 교유관계를 조사하였다. 이색과 어울린 사람은 약 100명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는 과거에 급제한 新興儒臣들이 가장 많았고, 그밖에도 고위 관료나 耆老들과도 폭넓게 왕래하였다. 승려들과도 왕래가 잦았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글 값을 매개로 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우왕 5년 이색의 정치ㆍ사회적 위상
3. 일상생활과 교유관계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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