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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선자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인물사연구회 한국인물사연구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발행연도
2009.3
수록면
333 - 36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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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일본인 와키다 신부가 광주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광주교구장의 일본인 성직자 임명은 일본천주교회의 통치권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서 일본인 성직자들에게로 이관된 사실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울교구장에 한국인 성직자가 임명된 후 일제는 교황청의 결정을 불평하고, 신임 교구장 임명이 결정되지 않은 대구교구와 광주교구에 주목하였다.
일본인이 광주교구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교구의 통치권이 서구인 선교사에게서 일본인 성직자에게 넘어간 것은 표면적으로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였지만, 교회 내적으로 보면 현실을 적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현지화에 소홀하였던 서구인 선교사들의 망설임, 그리고 한국인 성직자들의 직무유기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체포되자 광주교구의 신자들은 심한 공포감을 느껴 대단히 위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일본경찰은 서양인 선교사들의 체포에 이어 그들과 접촉하였다는 이유로 한국인 신부와 신자들도 체포, 감금하였다. 전황 변화는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키나와가 연합군에 점령된 후 목포에 합숙 중인 골롬반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은 간첩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충청도 이북으로 이동 수용되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와키다 신부가 관할하던 광주교구의 교세는 쇠락의 길로 떨어졌다.
일본인이었지만 와키다 신부는 천주교 신부로서 전시체제기 광주교구는 물론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군국주의정책에 일본인 성직자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한국천주교회의 교구장직에 임명된 것은 결국 그의 의지였다. 따라서 나름대로 한국교회를 위해 노력했을지라도, 일제식민통치자들의 불합리한 행동에 저항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는 사과를 필요로 한다. 한국이 해방되자 와키다 신부는 한국 국민들에게 사죄한다는 편지를 썼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목차

【국문요약】
Ⅰ. 머리말
Ⅱ. 와키다 신부의 제2대 광주교구장 취임
Ⅲ. 와키다 교구장 재임기의 광주교구
Ⅳ. 전시체제와 교회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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