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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훈식 (인제대학교)
저널정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한국학논집 한국학논집 제45집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25 - 5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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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후반 成宗 무렵 조선왕조에는 士林派로 불리는 새로운 지식인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고려말기까지 소급하였고, 그 결과 鄭夢周?吉再?金叔滋?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道充論이 정립되었다. 이 도통론을 받아들인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처음부터 사림파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학문?사상을 이해하였다. 근?현대의 유학사 인식 역시 이 도통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조선초기 유학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이러한 인식이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官學派가 조선초기의 학계를 지배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건국을 전후한 시기부터 관학파와는 다른 學風?文風을 가진 유학자 집단 혹은 유학자들이 존재했다는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흔히 이러한 유학자들을 가리켜 ‘節義派’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절의파’를 계승하는 유학자들이 성장하여 성종 무렵에는 훈구파와 대립하는 학문?정치세력, 즉 사림파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글은 절의파의 계기적인 발전 속에서 사림파의 등장을 설명하기 보다는 15세기 후반기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 사림파 등장의 계기를 찾고자 하였다. 세조의 즉위 이후 관학파는 훈구파로 변화하였다. 그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 절의의 문제였다. 관학파는 절의라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면서 새로운 왕조의 관료윤리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 이후 훈구파로 변화한 집권세력은 더 이상 절의라는 가치를 강조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절의를 부정한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종 때 사림파로 불리는 한 무리의 새로운 유학자 집단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절의라는 가치를 내세워 훈구파에 맞섰고, 그 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도학 공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도통을 정립할 때 그들이 선택한 인물이 역성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불사이군’의 충절을 실천했던 정몽주와 길재였다. 역성혁명 이후에 충절을 실천한 인물이 길재 한 사람 뿐은 아니었겠으나 마침 길재는 김숙자의 스승이었고, 김종직은 김숙자의 아들이었다. 정몽주와 길재 사이의 학문적 관계는 권근과 길재 사이의 관계에 비해 훨씬 미약한 것이었지만 절의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계통이 설정되었다.
이처럼 사림파의 戀痛命은 실제 학문?사상의 繼起的 發展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5세기 후반기 이후 사림파의 정몽주?길재에 대한 再解釋을 통해 성립한 것이었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문?사상을 계승한 학자들이 사림파로 결집한 것이 아니라 사림파로 결집한 학자들이 정몽주와 길재를 자신들의 학문적 선구로 설정했다는 것이 훨씬 더 사실에 가깝다.

목차

머리말
1. 易姓革命을 둘러싼 士大夫 세력의 분화와 통합
2. 官學派의 성립과 유교문화의 보급
3. 官學派의 변질과 士林派의 등장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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