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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호동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연구 인문연구 제55호
발행연도
2008.12
수록면
1 - 2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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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죠 마사오는『竹島問題에 관한 調査硏究 最綜報告書』에서 일본의 에도(江戶)시대의 독도에 관한 문헌을 검토한 결과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그 주된 근거로 안용복이 울릉도에서 동북방에 있는 큰 섬을 두 번 보았고, 그 섬을 아는 자로부터 우산도라고 한 진술에 대해, 그 섬은 현재의 죽도이지 독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용복이 우산도를 동북방에 있다고 한 것은 그가 부산 동래에서 살면서 우산도가 울릉도보다 동북방에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 표현일 뿐이다.
임진왜란에서부터 숙종 19년 안용복이 울릉도에 출어하기까지 울릉도는 일본이 울릉도를 독점하였다고 하지만 『竹島紀事』에 의하면 조선인들이 숙종 17년(1861)부터 울릉도로 출어하였음이 확인된다. 실상은 조선과 일본에서 이익을 찾아 울릉도와 독도로 어로행위를 위해 어민들이 끊임없이 찾아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가 숙종 17~18년 이후부터 조선에서 조직적인 상업의 이득을 취하는 무리들이 울릉도에 오기 시작하면서 서로 오오야ㆍ무라카야 양 가문의 선단과 충돌하면서 안용복 사건과 ‘울릉도 쟁계’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용복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동래에 와 있었던 역관 나카야카가 숙종 19년 봄, 울릉도로 가는 배 3척에 밀정을 동행하게 한 것은 쓰시마번이 훨씬 이전부터 울릉도 사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우려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조치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17세기 중엽 독도 ‘고유영토설’은 일본 측 자료에 의해서도 부정됨을 확 인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최종보고서』에 인용된 에도시대 일본 자료와 시모죠 마사오(下條正男)의 해석
3. 에도시대 일본 측 자료를 통해 본 ‘독도 영유권 강화’ 논리 보완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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