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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진호 (서원대학교)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평화연구 평화연구 제20권 제2호
발행연도
2012.10
수록면
241 - 289 (4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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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베를린 위기는 1955년 제네바 회의의 결렬이후 현상유지를 원하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발생되었던 사건으로써 유럽의 긴장을 야기했던 사건이었으며 베를린 장벽으로 수습되었다. 1955년 제네바 승전국 회의에서 평화협정이 결렬됨에 따라 독일은 영구분단의 길로 들어섰으며 독일은 베를린을 제외하고 안정적인 분단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1957년 서독정부가 발표한 베를린 선언은 독일통일의 대헌장이라고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일분단의 대헌장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분단의 현상을 유지하는 서독 정부의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한 베를린의 지위를 확정하기 위한 시도가 불가피했다. 제2차 베를린 위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문제해결안으로 연합안을 제시했으나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었고 양측 모두 포츠담 질서에 의해 형성된 현상유지를 통한 상호공존과 평화유지에 관심이 있었다. 평화협정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현상유지를 위한 장벽은 불가피했다.
베를린장벽으로 베를린은 현상유지 되었고 장벽건설로 인해 두 차례에 걸친 베를린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서독정부 역시 베를린 위기 중에 글롭케안을 비공개적으로 제시했으며 이는 서독정부가 분단과 현상유지라는 현실과 타협한 안이라고 볼수 있었다. 그러나 글롭케안 역시 미국과 소련의 이익과 배치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장벽건설로 베를린상황은 안정되었다. 장벽건설 이후 동서무역은 증가했으며 서독은 기존 동방정책을 탈피해 더욱 공세적이고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동방무역을 가속화하게 되었다. 위기 중에 규정되지 못했던 베를린의 지위는 1971년 9월 베를린협정으로 문서상 현상유지 되었고 잠정합의 되었다. 본고에서는 2차 베를린 위기로 인해 논의되었던 독일연합안과 글롭케안 그리고 위기를 수습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장벽으로 귀결되었던 맥락에 대해 외교사적으로 분석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후르시초프의 최후통첩과 제2차 베를린 위기의 시작
Ⅲ. 글롭케안(Glopke Plan)과 베를린문제의 교착상태
Ⅳ. 베를린 장벽과 제2차 베를린 위기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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