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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현규 (순천향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40호
발행연도
2012.11
수록면
71 - 9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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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17세기 초반 조선 사은사, 진위사와 명 등극조사가 함께 첫 번째 해로사행에 나서면서 마조와 관련된 사항을 찾아보고 분석한 글이다. 마조는 원래 湄洲島와 그 일대에 바다를 보호하는 신이다. 훗날 조정의 비호와 관방의 관심 아래 국가의 제전으로 승격되었다. 해로 사행과 관련된 마조 사적은 국가 제전으로 발전하고 신앙을 전파하는데 중대한 매개체로 활용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천계 1)에 조선과 명나라는 뜻하지 않게 이백년 동안 중단되었던 해로 사행을 다시 열었다. 첫 번째 중국행 해로사행은 조선 사신과 명나라 사신이 조선 조정에 제공한 선박을 타고 평안도 安州에서 산동 登州까지 들어갔다. 이번 해로사행에 일어났던 마조 기록과 일화는 사행자의 심리 변화와 廟島列島의 마조 현황과 발전 과정을 알아보는데 좋은 자료이다.
명 등극조사 劉鴻訓은 묘도 마조묘의 募緣 책자에다 해로에서 두 차례나 체험한 마조 영험을 적은 募緣文을 남겼다. 타기도와 묘도에 각각 향불이 계속 타오르는 천비묘가 있었다. 묘도 천비묘가 타기도 천비묘에 비해 조금 크고 넓었으나 묘우 상태가 많이 퇴락하였다. 훗날 유홍훈의 마조 사적은 유홍훈 자신의 입장 변화와 조정에 상주하지 않았던 관계로 다른 송명 사신들의 마조 사적에 비해 후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유홍훈과 함께 해로사행에 나선 조선 서장관 安璥은 중국으로 갈 때 마조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귀국할 때는 많은 변화를 보였다. 안경은 해로 귀환의 험준함, 출항 시기의 부적합, 조난 사고에 대한 풍문, 뱃사람의 사기 진작 등은 안경으로 하여금 묘도 마조묘에 나가 향을 사르고 제문을 지었다. 안경 이후 등주노선으로 나가는 조선 사신과 뱃사람들은 묘도 천비묘를 참배하거나 마조 신앙을 신봉하는 행위를 보였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劉鴻訓의 ?祖 사적과 廟島 天妃廟 募緣文
3. 安璥의 ?祖 인식과 廟島 天妃廟 제문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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