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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진열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46輯
발행연도
2013.7
수록면
145 - 195 (51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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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유목민이 몽골고원에 세운 유목국가나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를 지배했던 이민족왕조는 漢人(중국인)을 비롯한 정주·농경민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나라마다 이들을 활용한 양상은 달랐다.
匈奴·突厥·위구르·몽골(明淸時代) 등 유목국가는 漢人보다도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定住農耕民, 혹은 상인들을 중용하였다. 돌궐과 위구르에서 활약한 소그드인들은 중국과 유목국가(突厥·위구르), 서아시아,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을 잇는 동서교역에 유목국가 대신 종사하여 많은 이익을 남겼고 유목국가의 지배층과 나누었다. 그리고 유목민들에게 종교(마니교)와 문자(소그드문자) 등을 전파하였다. 유목국가는 이들을 통해 정주적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국가의 제도나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비트포겔이 침투왕조(잠입왕조)라 불렀던 五胡諸國·北朝에 出仕한 漢人官僚들은 胡族君主를 섬기며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五胡諸國과 北朝의 여러 나라가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五胡諸國과 北朝는 이민족과 漢人을 별도의 戶籍이나 지방행정조직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胡漢分治정책을 취했다. 그리고 北魏처럼 유목국가에서 유래하는 官制나 의례를 여전히 유지하여 중국식 관제와 병용하였다. 五胡諸國과 北朝는 유목국가와 비교하면 漢人官僚의 정치적·제도적 영향력이 컸고 소그드인 등 중앙아시아인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征服王朝인 契丹(遼)은 韓延徽·韓知古 등 漢人官僚의 도움을 받아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五胡諸國·北朝의 胡漢分治처럼 유목민과 漢人을 나누어 통치하는 北面·南面이라는 二重體制를 유지하였다. 몽골제국에서는 위구르인과 무슬림 등 소위 色目人이 관리, 특히 재무관료가 되어 漢化된 契丹人인 耶律楚材와 女眞人 粘合重山, 姚樞·許衡·劉秉忠 등 漢人관료들보다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돌궐·위구르·몽골제국의 지배층은 정주적 요소를 받아들이려고 하거나 받아들인 카간(카안)에 반발하며 유목적 요소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정주문명을 대표하는 도성 건설을 두고 代國(拓跋部), 돌궐, 몽골제국에서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일부 관철되었다. 반면 北魏 孝文帝의 漢化政策에 반발한 皇太子 元恂과 穆泰·陸叡는 반란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살해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북아시아 유목국가와 漢人·西域人의 역할
Ⅲ. 中國內 이민족왕조와 漢人·西域人·色目人
Ⅳ. 유목국가·이민족왕조의 정주문물 수용 반발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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