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정목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서강인문논총 西江人文論叢 第37輯
발행연도
2013.8
수록면
165 - 213 (4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鄕歌모죽지랑가의 창작 동기와 정치적 배경에 대하여 논의한다. 이 노래는 得烏가 竹旨郞사후에 지은 輓歌이다.
이 노래 창작 시기의 孝昭王은 16살에 왕위에 올라 26살에 돌아가셨다. 여기에 관한 한 『삼국유사』의 기록이 옳고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효소왕은 太宗武烈王의 손자(神文王)과 외손녀(神穆王后)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목왕후의 아버지 金欽運은 『삼국사기』 ‘열전’의 金歆運과 동일인이다. 그는 태종 무열왕의 사위로서 655년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때 그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다. 이 딸은 28살도 더 되었을 683년에 신문왕과 혼인하였는데 그 전에 그들에게는 세 아들[孝昭王, 寶叱徒太子, 聖德王]이 있었다.
이 아들들이 신문왕의 國舅金欽突의 亂의 원인이다. 이 난으로 일부 화랑도 출신 귀족들이 誅戮되고 逐出되었으며 화랑도가 폐지되었다. 이것이 신라 귀족 사회의 분열의 원인이 되어 국가 興亡盛衰에 영향을 미쳤다. 이 노래는 화랑도 출신 귀족인 죽지랑이 화랑도가 폐지되고 동료들이 축출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불우하게 만년을 보내고 효소왕 치세 초반에 이승을 떠난 후에, 得烏가 죽지랑의 초상 날 장례 때나 대상 날 탈상재 때에 사용할 輓歌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노래가 『三國遺事』 ‘紀異篇’에 실려 있는 것은 이러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는 이와 관련된 기록에서 누락이 있고 소루한 편이다.이에 반하여 『삼국사기』 ‘열전’ 金歆運조는 ‘본기’의 기록이 보여 주지 못하는 정보를 싣고 있어 그의 외손자들과 관련된 史實에 빛을 비추고 있다. 그 빛은 모죽지랑가의 정치적 배경과 창작 동기를 밝히려는 우리의 추리에도 주요 열쇠가 되어 주었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향찰 해독
3. 孝昭王은 누구인가
4. 죽지랑과 김흠돌의 난
5.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4-000-002467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