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태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42輯
발행연도
2013.12
수록면
235 - 288 (5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지금까지 정약용과 천주교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서 논쟁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접근 방법과 달리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언급한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자찬묘지명〉의 내용에 대한 이해 역시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임을 말해준다는 긍정론과 이와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부정론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현재 부정론이 우세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자찬묘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남긴 두 개의 묘지명인 ‘광중본’과 ‘집중본’에서 천주교를 서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더 이상 천주교가 서학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종교로서 조선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천주교 박해의 정치적 원인을 밝혀주는 한편, 순교사 중심의 한국 천주교회사 이해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정약용이 이를 통해서 조선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관용책 내지 포용책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신처럼 반대파의 무고로 인하여 그러한 고통을 받는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약용이 배교하면서 1796년에 작성한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에서 천주교를 사교라고 규정하면서 비판하던 양상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이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해 다시 달라진 태도를 가지게 된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체적으로 정약용에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인 1820년대 무렵, 늦어도 1822년의 일로 파악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자찬묘지명〉에 대한 논쟁
3. 〈자찬묘지명〉의 천주교 관련 내용
4. 〈자찬묘지명〉의 새로운 이해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5-230-000977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