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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흥섭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23집
발행연도
2013.12
수록면
435 - 46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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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왕실에서 간관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예연에 여악을 존속시켜야만 했던 핵심 사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연을 제외하고는, ‘중국사신 접대’ 때문이라는 것이 논자의 가설이다. 그리고 이 가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로 입증되었다. 이를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연산군은 여악을 설치한 목적은 오로지 대비전에 잔치 올리는 일 및 사신 잔치와 명절 때 경축하는 잔치를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혔다. 2. ① 중종 4년 여악이 명분상 정악은 아니지만 현실적 필요(중국사신 연향)에 의해 수용했다. ②5년에는 신하의 의견을 수용해 여악 사용을 금한다. 이후 10여 년간 여악은 궁중에서 사라졌다. ③15년에 들어서 서울에 있는 여악의 비는 자리를 보충하거나 지방에서 중국사신 접대를 위해 10여 년 만에 지방의 여악을 복구하고, 아울러 중국사신을 위해 서울에서는 정전에서도 사용했으며, 이후에는 이것이 왕실의 당연한 관례가 됐다. 3. 명종 대는 중종 대의 여악에 관한 왕실의 주된 견해를 계승했다. 4. 선조 대에는 중국사신에게 임진전쟁 이전에는 물론 심지어 전쟁중에도 중국 장수들에게도 여악을 제공했다.
이와 같이 연산군?중종?명종?선조 등 16세기 역대 왕들은 모두 여악의 존재를 현실적 필요(중국사신 접대)에 의해 인정했기에 신하들의 예악사상에 근거한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악을 존속시켰다. 즉 조선 건국 이후 중국(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정치적?문화적?이념적 사대관계에 처한 조선 왕들에게 중국(명나라) 황제의 사신은 최고의 예를 다해 극진히 대접해야 하는 존재였으며, 이런 접대의례는 곧 조선의 왕권 및 왕실의 안정과도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말하자면 16세기 조선왕실의 여악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의 징표이자 상처였던 것이다.

목차

요약문
1. 연례의 꽃, 여악
2. 예악이냐 왕실이냐
3. 천사天使를 배려한 연례
4. ‘사대외교’의 징표이자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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