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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희곤 (안동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6집
발행연도
2013.12
수록면
219 - 256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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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는 전통적으로 유림이 뿌리를 강하게 내린 곳이다. 따라서 성주사람들이 펼친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는 이 지역의 유림들이 가진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성주는 한주학맥을 계승한 인물들이 중심을 이룬 곳이다. 따라서 이 학맥의 현실인식은 독립운동의 전개 양상에 고스란히 녹아났다. 그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먼저 독립운동을 펼친 주축은 한주학맥을 잇는 사람들이었다. 만주로 망명한 이승희와 제1,2차 유림단의거를 이끌어간 김창숙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기에 송준필과 장석영 등이 3·1운동과 파리장서에서 중요한 몫을 해냈다.
둘째, 성주의 독립운동은 첫 단계에 다른 지역의 의병과 달리 외교활동에 집중되었다. 여기에는 곽종석의 영향이 컸다. 외교활동을 추구한 성향은 뒷날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게 된 연원이 되기도 했다.
셋째, 성주유림이 펼친 애국계몽운동은 중화주의를 바탕으로 삼은 보수성향이 강하게 잔존한 바탕 위에 펼쳐졌다. 따라서 만주로 망명한 이승희도 전통을 고수하는 성향이 강했고, 끝내 공교회 활동으로 생을 마감한 것도 그러한 성향을 말해준다.
넷째, 성주사람들이 펼친 항일투쟁은 제1·2차 유림단의거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성주사람들이 가장 중심축을 이루었고, 김창숙의 존재와 기여도가 단연 앞섰다.
다섯째, 3·1운동이 유림과 기독교 연합으로 펼쳐진 것은 전통유림이 강하게 남은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슷했다. 성주의 기독교 세력은 3·1운동에서 일시적으로 민족문제에 목소리를 내면서 동참했다가 그 뒤로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이는 보편적인 추세에 속했다.
여섯째, 성주유림은 항일투쟁사 전체로 보아 보수성을 유지하였다. 애국계몽운동과 망명을 펼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성향은 보수성을 갖고 있었다. 1910년대만이 아니라 1920년대에 들어 두 번째 혁신적인 변화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주의와 관련하여서도 반응은 늦었고, 이 지역에서 사회운동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성주유림의 성향과 외교방략 추구
3. 1910년 전후의 독립운동
4. 3·1운동과 제1차 유림단의거(파리장서운동)
5. 제2차 유림단의거와 1920년대 이후의 독립운동
6.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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