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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九義 (慶北大學校)
저널정보
동아인문학회 동아인문학 東亞人文學 第27輯
발행연도
2014.4
수록면
95 - 135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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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주자(朱子) <관서유감(觀書有感)>시가 우리나라 시인들한테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고찰한 논문이다. 이 <관서유감>시가 고려 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수용되었다. 특히 16세기 이후 주리파(主理派)들에 의하여 이 시가 다시 주목받았다. <관서유감> 시의 구절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퇴계 이황이 처음이다. 이후 신정모(申正模), 탁계(濯溪) 김상진(金相進), 정조(正祖), 곽종석(郭鍾錫) 등이 나름대로 이 시를 풀이하고 있다. 이들을 보면 정조와 김상진을 제외하면 모두 경상도(慶尙道) 사람으로 퇴계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다.
<관서유감>시의 수용 양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관서유감’이라는 제목을 수용한 경우이다. 이 경우는 주자의 <관서유감> 시와는 그 내용이 다르다. 주자의 시에 화운 또는 차운하지 않았고 형식도 5언 또는 7언, 절구 또는 율시로 다양하다. 이러한 제목의 시가 16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에 해당하는 시인들은 대부분 영남지방 출신 학자들이다.
둘째 화(和)?차운(次韻)을 통한 형식(形式)과 내용(內容)의 수용이다. 이에 해당하는 시인들은 모두 주자의 <관서유감>시의 형식과 내용을 많이 수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영남지방 출신 학자들이며, 퇴계학맥(退溪學脈)을 잇는 주리파(主理派) 학자(學者)들이다. 이는 퇴계(退溪)가 주자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곧 퇴계가 직접 ≪주자대전≫을 완독하였고, 주자의 편지를 추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관서유감> 시를 수용하고 그 맥(脈)을 잇는 사람은 영남지방, 그것도 퇴계학맥과 직결된다. 조선(朝鮮) 22대 임금인 정조(正祖) 또한 남인(南人)을 중시하였기에 퇴계학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셋째 용사(用事)를 통한 <관서유감>시에 나오는 어휘(語彙)를 수용한 경우이다. 조선 시대 시인들이 주자의 <관서유감>에 나오는 어휘(語彙)를 빌려 쓴 경우가 대단히 많다. 첫째는 제목을 수용한 경우이고, 둘째는 제1수(首)의 어휘를 용사한 경우, 셋째는 제2수(首)의 어휘를 용사한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지역에 관계없이 많은 시인들이 주자의 시에 나오는 어휘를 수용하고 있다. 특히 16세기 이후의 작품에서 주자의 이 시에 용사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또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생활공간의 이름도 주자의 <관서유감>에 나오는 시어를 빌려 쓰고 있다. 이는 그만큼 주자의 이 시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觀書有感>에 대한 諸家의 解說
Ⅲ. <觀書有感>의 受容 樣相
Ⅳ. 맺음말
參考文獻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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