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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익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44輯
발행연도
2014.6
수록면
143 - 183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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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전 조선왕조는 정기적으로 보내는 연행사절을 통해 서양 문물과 접촉할 수 있었는데, 그 주된 통로가 북경의 천주당이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연행사절의 천주당 방문은 조선과 청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18세기에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18세기에 연행사절은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의 안내로 각종 서양 기물(器物)을 관람하고, 서학서(西學書)를 선사받는다. 이들 서학서 중에는 예수회 선교사가 천주교의 교리를 해설한 천주교 교리서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18세기 연행사절 중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 선교사와 접촉하며, 서교(西敎, 천주교)를 개방적으로 접한 인물로는 이기지(李器之)와 이의봉(李義鳳)이 주목된다. 자제군관(子弟軍官)의 신분으로 연행한 이들은 둘 다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는 실학적 가풍에서 생장한 젊은 문사(文士)였다.
18세기에 연행사절을 통해 전래된 서학서는 조선 사회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천주교 서적은 실세한 남인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들 천주교 서적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한글 번역본이 출현하면서 일반 양인층에게도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종악(朴宗岳)이 정조에게 올린 편지를 기록한 《수기》(隨記)를 통해 그러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19세기에는 북경의 천주당 방문이 금지되게 된다. 이에 19세기의 연행록에는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천주당을 방문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대신 아라사관(俄羅斯館, 러시아관)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한 사실이 몇몇 연행록에 보인다. 아라사관에 있는 천주당을 방문하면서 연행사가 주목한 것은 십자가의 형벌에 처해져 죽은 예수의 처참한 형상이었다. 1828년에 연행한 이재흡(李在洽)은 십자가의 예수상을 보고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18세기 연행사절의 북경 천주당 방문 양상
3.《수기》(隨記)를 통해 본 18세기 말엽 충청도 지역에 유포된 천주교 서적
4. 19세기 연행사절의 아라사관(俄羅斯館) 천주당 방문 양상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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