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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선빈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회 제45호
발행연도
2014.7
수록면
327 - 35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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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靑 徐起(1523-1591)는 한미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신분사회의 질곡 속에서 거의 개인적 역량으로 한 시대에 기록될 만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이지함과 이중호에게 배운 그의 학문은, 서경덕?김굉필의 학통을 이은 것으로, 수신을 중시하고 도학의 정신을 실천하는 학풍이었다. 그는 만년기에 공주 공암에 정착하여 살다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19년간 많은 제자를 양성함으로써, 16세기 후반 공주지역의 성리학적 분위기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청 서기가 타계한 후에는 그가 강학하면서 세웠던 孔巖書院이 사액을 받아 忠賢書院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사족들과 후손들은 16세기의 미천한 인물인 고청 서기를 끊임없이 追崇하고 있으며,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文廟從祀의 대상으로까지 거론하고 있다. 문묘종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후 서기에게는 비록 조선왕조가 망하기 직전이기는 하지만 정2품의 관직이 추증되었고,‘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일제 강점기 초에는 묘소 앞에 신도비까지 세워졌다. 반면에 이에 짝하여 민중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서고청 설화가 양산되었다. 고청 서기의 역사적 실재와 달리 다양한 서고청 설화가 민중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는 당시 사족 위주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속에서 한미한 출신인 그가 거의 개인적 역량으로 한 시대를 주름잡을 수 있는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에, 후대인에 의해 그의 신비한 성향이 증폭된 결과일 것이다.
고청 서기의 만년 講學處로 충현서원이 있는 공주 공암에는 고청 서기의 묘소가 있으며, 묘소에서 동쪽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맞은편 작은 바위산에 깊지 않은 굴이 있다. 이것이 孔岩으로, 이 굴로 인해 마을 이름도 공암리이다. 서고청의 탄생은 이 공암굴과 관련 있다는 전설이 구전되어왔으며, 따라서 이 굴은 ‘고청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암은 서기가 만년에 정착한 마을로 중년이전의 고청 서기와는 무관한 곳이지만, 민중들은 한미한 신분의 한계를 딛고 당대의 신분제 사회라는 질곡을 극복하며 그의 이름답게[起] 우뚝 선 인물에게 그에 걸 맞는 출생담과 탄생지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청 서기의 만년 강학처인 연정, 사후에 묻힌 묘소, 위판이 봉안된 충현서원이 있는 공암 마을에 역사적 실재와는 달리 그의 탄생과 관련된 ‘고청굴’이 등장함으로써, 이제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웅’ 고청 서기에 대한 連環構造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게 되었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고청 서기의 생애와 역사적 실재
3. 고청 서기에 대한 기억의 이중주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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