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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張日圭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32호
발행연도
2014.12
수록면
83 - 117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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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의 ‘一統’인식이 형성·변화한 과정을 살피고, 그것이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미친 영향을 고찰한 것이다.
통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義軍’ 과 함께 ‘선왕의 뜻’을 이어 ‘원흉을 제거하였다’고 국내외에 알렸다. 하지만 통일 전쟁이 끝난 뒤에 신문왕은 ‘一統三韓’·‘統三’을 강조하면서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신라 백성의 추숭’을 부각하였다. 이것은 원성왕과 소성왕 이후까지도 계속 유지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아울렀다는 ‘일통’인식은 신라 중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하대 초에 정립되었다.
신라 말에 ‘일통’인식은 혼재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대체로 왕명을 받아 비명을 찬술하였던 유학지식인에 의해서 나타났다. 곧 金穎은 ‘삼한’과 ‘신라 백성’을 강조하였는데, 崔致遠은 신라 백성을 위무하였던 무열왕을 강조하였다. 특히 최치원은 ‘일통삼한’·‘통삼’에서 ‘삼한’을 ‘삼국’으로 바꾸어 이해하면서, ‘一統三韓’과 ‘一統三國’을 함께 강조하는 ‘일통’인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신라와 발해를 둘러싼 進士試급제 경쟁에 관련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발해를 비난하면서 신라의 통일을 강조할 때, 삼한의 비정을 달리하며 진한인 신라 국가를 앞세우는 ‘일통삼국’인식을 애써 강조하였다.
후삼국시기에 ‘일통’인식은 다시 변화하였다. 견훤과 왕건은 세력을 다투면서 ‘일통삼한’인식을 거론하였다. 그들은 신라 국왕을 존중하고 수호해야 할 ‘尊主’로 부각하였다. 특히 신라의 영역을 나누어 지배하였으므로, ‘일통삼국’ 이 아닌 ‘일통삼한’ 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의자왕의 宿憤’을 강조하였고, 왕건은 고려를 세우면서 ‘고구려의 원수’ 가 아닌 ‘고구려’ 를 강조하였다. 견훤은 백제 국가를 유념한 ‘일통삼국’ 을 나타내었지만, 왕건은 사회적·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쏟으며 이전의 ‘일통삼한’을 내세우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 신라 국가를 부정하였던 백성들은 점차 ‘삼한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일통’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민심은 왕건 쪽으로 기울었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에도 고려는 ‘일통삼한’인식을 유지하면서, 따로 ‘고구려 계승의식’ 을 내세우며 발해 유민을 아울렀다. 신라의 ‘일통’인식은 후삼국시기에 통일 방안의 하나인 ‘일통’의식으로 기능하였던 셈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일통삼한’ 인식의 정립
Ⅲ. ‘일통삼한’ · ‘일통삼국’ 인식의 공존
Ⅳ. ‘일통삼한’ 인식으로의 회귀
Ⅴ. 맺는 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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