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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83집
발행연도
2016.9
수록면
301 - 33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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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9세기 전반 신라의 정치 동향에 대하여 애장왕 9년(808)부터 흥덕왕 10년(835)까지 정치적 위상이 높았던 충공이라는 인물을 통해 파악해 보았다.
충공은 애장왕 9년(808) 재상으로서 당에서 문극을 하사받은 후 애장왕 시해에 가담하게 되었고, 이후 헌덕왕대부터는 형제인 흥덕왕과 함께 정치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헌덕왕대 흥덕왕의 즉위과정과 충공의 정치적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興德王陵碑片」에 前王인 ‘헌덕대왕의 寢膳(먹고자 는 것)에 가 있다(憲德大王寢膳有□)’라고 기록한 것을 헌덕왕의 건강상에 문제가 있었음으로 해석하였다. 헌덕왕이 건강상의 이유로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흥덕왕은 신라사의 전무후무한 副君이 되어 월지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충공은 女가 태자비가 됨으로서 차기 정치권력까지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어지는 ‘(고종)의 양암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高宗之諒闇無以加焉)’는 구절을 통해 헌덕왕의 喪禮에 최선을 다한 태자로서 흥덕왕의 모습을 추정해 보았다. 중국 측 사서에서도 흥덕왕이 弟가 아니라 子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모두 서술되어 있음과 ‘諒闇’의 의미로 볼 때 흥덕왕은 태자로서의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또 이때 결자는 『논어』와 『예기』의 구절을 통해 ‘高’ 임을 밝혀 보았다.
최치원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충공을 선강태자라고 표현한 것은 유학적 소양이 깊은 최치원의 다분히 계산된 표현인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당시 상대등이던 충공이 태자를 겸직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등이자 공인된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충공의 死後, 흥덕왕은 충공을 갈문왕으로 추봉하여 충공의 子인 明이 민애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준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듯 충공은 애장왕대부터 흥덕왕 10년(835) 死할 때까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애장왕대 충공의 정치적 입지
III. 헌덕왕대 흥덕왕의 즉위과정과 충공
IV. 헌덕 · 흥덕왕대 충공의 정치적 위상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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