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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동훈 (가톨릭대학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65호
발행연도
2016.11
수록면
225 - 256 (32page)
DOI
10.17647/jss.2016.11.6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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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시대 사부학당의 성립을 고려 오부학당과의 연계성과 한양 천도와 연관 지어 살펴보았다. 2장에서는 한성의 학당 설립을 새로운 도성 건설과 인구 이주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1261년(원종 2) 설립된 동·서 학당은 관학의 역할을 맡고 있던 12도를 편입시켜 오부학당으로 확장·개편되었다. 조선 건국 후 한양 천도와 정종의 개성 환도, 태종이 개성에서 즉위하면서 도성 민들도 개성으로 돌아왔다. 한성의 학당은 1411년(태종 11)부터 1424년(세종 6) 사이에 남·중·동·서부 학당이 세워졌다. 본고에서는 한성에 설립되지 못한 북부학당은 개성에 남아있을 것으로 비정했다.
3장에서는 개성 민들이 개성의 학교를 학당으로 인식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개성 학교가 학당으로 인식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고려의 성균관은 한양으로 천도 후 지방 군현이 되어 향교가 되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학당으로 인식했다. 개성 민들 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개성의 학교를 학당으로 인식했다. 이는 개성이 유후사라는 것을 근거로 했다. 유후사라는 것이 근거로 사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태종 대 한성과 개성 두 도성을 운영했던 양경 제도가 있었다. 양경 제도는 제도상으로는 세종 대에 종결되었지만,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그 관성이 계속되어 사료에 오부학당과 사부학당이 혼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태종 대 양경을 운영하는 과정 속에서 학당이 개성에서 한성으로 이설(移設)되었고, 마지막에 북부학당은 옮겨오지 못하면서 한성에는 사부학당만 설립되었던 것이다. 4곳의 학당이 한성으로 옮겨가면서 개성 민들은 옛 성균관을 학당으로 인식했다. 세종 대에 양경 제도가 종결되면서 도성의 학당은 4곳으로 확정되었지만, 개성을 도성으로 인식했던 관성으로 인하여 개성 민들은 개성 향교를 학당으로 인식했고, 조정에서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사료상의 오부학당과 사부학당의 혼용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개성 학당은 향교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사부학당이었기에, 북부학당 치폐에 대해 논란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오부학당(五部學堂)에서 사부학당(四部學堂)으로
Ⅲ. ‘개성 학당(開城 學堂)’에 대한 인식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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