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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지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67호
발행연도
2017.5
수록면
109 - 135 (27page)
DOI
10.17647/jss.2017.05.67.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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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반송방은 돈의문(敦義門) 밖에 위치한 성중오부(城中五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인가가 조밀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하였다. 특히 경기 지방을 관할하는 경기감영, 말을 빌려주던 고마청, 중국 사신 영접의가 행해졌던 모화관, 반송정, 서지, 천연정 등 관아와 명승처가 함께 공존한 지역이었다.
조선 전기 서거정은 「한도십영(漢都十詠)」을 통해 한양의 명소 열 곳 중에서 한 곳으로 반송방을 선택하였다. 이 반송방에 대한 주된 시재는 바로 ‘송객(送客) - 나그네를 보내며’이다. 즉 반송방의 장소는 이별의 공간인 것이다. 서거정은 반송방의 뛰어난 자연 경관이 아닌 인간 보편적 삶 속에서 만나는 “이별”을 대표하는 장소로서 반송방을 선택하였다. 서거정 이후 조선 전기 많은 시인들이 여전히 <반송송객>을 시제로 노래하였으며, 17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월과(月課)로 창작되었다.
18세기 초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은 영조가 선택한 조제탕평(調劑蕩平) 정책에 반대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맑고 깨끗한 산수를 벗하며 도성 안에서 시은자(市隱者)로 서대문 밖 반송방 부근 반송지에 은거하였다. 그는 반송방 서지(西池) 근처에 담화제(澹華齊)를 세우고 이곳에서 오찬(吳瓚 1728~1797), 김향묵(金向默), 이인상(李麟祥 17210~1760), 임매(任邁), 임과(任薖) 등과 더불어 반송방에서 시회를 열었다. 영조가 죽고 등극한 정조는 영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탕평책을 표방하였으나 이운영, 김종수 등 이윤영과 세손 시절부터 뜻을 같이 했던 청류지사들을 등용하여 우현좌척(右賢左戚)의 체계를 세웠다. 정조에게 반송방은 이윤영을 뜻하는 곳으로 즉 연꽃으로 상징되는 장소가 되었으며, 이에 정조는 반송방을 ‘이별장소’가 아닌 ‘연꽃을 감상하는 곳’으로 새로이 인식하였다. 정조가 <국도팔영(國都八詠)>이라는 작품에서 한양의 명소 여덟 곳을 뽑으면서 선택한 반송방의 시재는 ‘상련(賞蓮)’ 즉 연꽃 감상이다. 조선 전기와 주된 시재가 바뀌면서 반송방의 장소적 의미도 변한 것이다.
이후 이 반송방은 문인들의 시회 장소로 많이 사랑받았다. 정약용이 중심이 되었던 ‘죽란시사’는 늦여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반송방의 서지(西池)로 연꽃 구경을 하고 시를 지었다. 조선 전기 이별의 장소였던 반송방은 18세기에는 시회가 열리고 사람들이 만나 문화와 예술이 창작되던 장소가 되었다. 즉 ‘문화 예술의 공간’이 된 것이다.

목차

Ⅰ. 서론
Ⅱ. 조선 전기 반송방의 장소적 의미
Ⅲ. 18세기 노론계 청류사인의 文會 장소
Ⅳ. 18세기 남인계 문인의 詩會 場所
Ⅴ.결론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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