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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갑동 (대전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84輯
발행연도
2017.10
수록면
37 - 6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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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지역은 원래 백제의 大木岳郡이었는데 통일 신라 경덕왕 때에 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에 이르러 木州가 되었다. 군에서 주로 승격하였다. 그것은 목천 지역이 고려 왕조에 협조한 대가였다. 고려태조 왕건은 군현의 승강을 통치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비협조적이거나 항거한 지역은 군현의 격을 강등했지만 협조적이거나 공로를 세운 지역은 군현의 격을 승격시켰다. 그러한 통치의 일환으로 목천 지역이 대록군에서 목주로 승격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 왕조 성립 초기에는 청주 지역의 반란에 동조하였다. 청주 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삼국 시대에 백제 땅이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그 후 후백제 군이 청주에 쳐들어왔을 때 이에 협조하기도 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 왕건은 목천의 지방 세력에게 가축을 뜻하는 姓을 주었다. 牛 · 馬 · 象 · 豚 · 場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청주의 반란이 진압되고 여기에 중앙군이 주둔하면서 청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청주의 속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 13년에 이르러 태조 왕건이 古昌郡[경북 안동] 전투에서 승리한 후 천안에 도독부를 설립할 때는 많은 협조를 하였다. 지방세력의 일부가 지역민을 거느리고 도독부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 대가로 목주로 승격하였던 것이다. 왕건은 그 직후 청주에 나성을 쌓고 군대를 강화하면서 목주를 비롯한 청주의 속,군현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청주를 비롯한 인근 군현이 후백제에 붙지 못하도록한 조치였다. 이렇게 하여 천안도독부에 참여한 목천인들은 천안의 통제를 받고 목천에 남아 있던 세력은 청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 후 태조 23년 왕건은 군현제의 정비와 삼한공신의 책정 등과 함께 지방의 토성을 정리하면서 목천에 내려줬던 가축성을 정상적인 성씨로 바꾸어 주었다. 즉 牛를 于로, 象을 尙으로, 豚을 頓으로, 場을 張으로 개정하였다. 그 후 목천의 지방세력은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다가 고려 중기에 이르러 우학유와 장윤문이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출세 배경에는 정2품 右僕射를 지낸 우학유의 아버지이며 장윤문의 외할아버지인 우방재의 후광이 있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고려 군현제의 변화와 木州의 탄생
3. 목천의 지방세력과 천안도독부의 성립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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