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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은수 (상명대학교)
저널정보
호서사학회 역사와 담론 역사와 담론 第84輯
발행연도
2017.10
수록면
385 - 42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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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자유화’의 문제는 중국의 정치체제가 화궈펑[華國鋒]에서 덩샤오핑[鄧小平]으로 바뀌고 개혁개방의 노선이 선택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1978년 10월 무렵부터 베이징 시단에는 ‘민주의 벽’이 등장했다. 덩샤오핑은 11기 3중전회의를 전후로 하여 당의 공작중심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로 옮길 것을 확정하였고, 4개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기초로써 사상해방과 민주를 강조했다. 이에 민주화 운동은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문예계까지 급격히 확산되었다. 하지만 지도체제의 변경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해결한 덩샤오핑이 1980년 12월에 열린 중앙공작회의에서 ‘부르주아 자유화’를 정식으로 제기하면서 본격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이때 바이화(白樺)의 「고련(苦戀)」과 이것을 영화화 한 「태양과 사람[太陽和人]」이 ‘부르주아 자유화’에 대한 상징적인 공격 대상으로 되었다. ‘부르주아 자유화’를 둘러싸고 소위 ‘보수파’와 ‘자유파’는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지만, 그들의 차이는 주요 모순과 주요 임무를 둘러 싼 견해 차이에 불과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마오쩌둥의 문예사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전이었다. 당시 ‘자유파’와 ‘보수파’의 입장은 문혁의 잔류세력 앞에서 아직 결정적으로 갈라서지 않았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사상 해방의 제기와 문예계의 반응
Ⅲ. ‘부르주아 자유화’ 논쟁의 출발
Ⅳ. ‘고련’ 사건과 부르주아 자유화 논쟁의 격화
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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