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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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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동북아학회 한국동북아논총 한국동북아논총 제58호
발행연도
2011.3
수록면
23 - 41 (19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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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0월 10일 무창(武昌)에서의 봉기를 계기로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中華民國)이 건국되고 혁명지도자 손문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에서 수 천 년간 지속되어온 절대군주제는 폐지되고 새로운 ‘공화정’이 등장하게 되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신해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손문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革命派)는 중화민국을 건국하는 데까지는 역량이 미쳤으나 그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여기에서 혁명파는 보수 반동적 성격이 강했던 청조(淸朝)의 군사실력자 원세개(袁世凱)와의 타협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고, 손문은 원세개에게 임시 대총통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임시 대총통이 된 원세개는 곧 국회를 무시하고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는가 하면 정치적 라이벌을 암살하는 등 독재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다시 황제(皇帝)의 자리에 앉는 등 반동적 모습을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 제2혁명이 전개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논문은 이처럼 중국에서 전제정치(專制政治)를 종식시키고 중화민국을 건국하였던 신해혁명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중심적 지도자였던 손문의 역할을 고찰하는 한편, 왜 손문이 중화민국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지 못하였으며 자신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유언을 남기며 별세해야만 했는지 그 까닭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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