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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동북아학회 한국동북아논총 한국동북아논총 제63호
발행연도
2012.6
수록면
209 - 227 (19page)

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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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차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으로 중국의 양무파는 자강운동 일환으로 양무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청일전쟁으로 실패하였고 이후 변법파는 변법운동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변법운동 역시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렇듯 중국의 자강운동은 실패를 거듭하며 결국 쑨원의 혁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청말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청조의 위기 속에서 개혁에서 혁명이라는 단계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는 차원에서 변법운동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캉유웨이(康有爲)와 혁명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쑨원(孫文)의 사상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혁명파를 대표하는 쑨원의 사상과 변법파를 대표하는 캉유웨이의 사상은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이 글을 통해서 살펴보고, 변법의 시기에서 혁명의 단계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여다봄으로써 그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캉유웨이는 대동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 중국의 정치 개혁 즉 중국을 부국강병한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립하여, 다른 서양 자본주의 국가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하였다. 『대동서(大同書)』에서 지적한 대동의 방식은 혁명을 찬성한 것은 아니고 변법을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서양의 정치를 학습하여 군주전제를 군주입헌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역시 민권설을 주장하였으나, 그의 민권설은 황제의 권력에 의지하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도덕적 정치적 혼란을 일찍이 걱정하였던 캉유웨이는 혁명이 도래하는 시기에도 여전히 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쑨원 역시 아주 어린 시절에는 전통교육을 받았지만, 성장기에는 서양교육의 영향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쑨원의 교육환경은 서양 학설에 대한 객관적 분석과 함께 혁명의 시각을 갖게 하였다. 그의 혁명 사상은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에서 출발하였다. 변법 실패 후 청조의 부패와 무능이 심각해질 때 그는 혁명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그는 삼민주의를 주창하였다. 그 중 하나인 민생주의에서는 대동 사회를 말하고 있다. 쑨원이 생각하는 대동 사회는 공산주의란 말과 상통하고 또 그 말은 사회주의라는 말과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상은 중국의 전통적인 대동사상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전통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민생주의가 달성된 세상 즉 대동의 세계에 이르는 필수 과정으로서 민족의 해방, 국가의 독립을 우선 획득하고 이를 민주주의의 형태로 전개하려는 쑨원의 계획과 사상은 캉유웨이가 생각하는 대동의 이상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중국 전통의 유가 사상에서 볼 수 있는 대동(大同)을 하나의 이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물론 캉유웨이와 쑨원이 대동이라는 세계에 이르는 방법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캉유웨이는 개혁을, 쑨원은 혁명을 택한 방법론의 차이가 있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전 쑨원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와 캉유웨이를 중심으로 한 보황파(保皇派)는 서로 정치적 행보와 목표에서 차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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