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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진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역사민속학회 역사민속학 역사민속학 제53호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93 - 12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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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감선과 금주는 조선 시대 내내 필요에 의해 실행과 철폐를 거듭하였다. 왕의 밥상에 제한을 가하는 감선은 처음에는 왕실의 제사에서부터 시작되어 고위 관료들의 졸거에 대한 애도의 표시 등으로 시행되다가 점차적으로 가뭄이나 추위 등과 같이 자연의 재해에 대한 공구수성의 표현으로 비중을 옮기게 되었다.
왕의 善政과 失政은 하늘이 판단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고대, 중세적 사고와 성리학적 군주의 표상이 겹쳐지면서 그 실효와는 별개로 감선은 바람직한 聖君의 자세로 이해되었다. 국가의 근간산업인 농사에 절대적 조건이었던 기상은 마치 인간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했으며, 자연재해에 수반된 기근의 상황에서 왕의 감선은 곧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했다.
같은 상황에서 백성들에게는 禁酒라는 제재가 가해졌다. 물론 금주령은 왕과 백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도 했으나, 실제적으로 왕의 밥상에서 술은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술은 왕의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품목이었기 때문에 간혹 왕들이 백성과 함께 금주의 뜻을 비추는 경우에도 관료들의 반대로 왕실에서의 음주는 이어졌다. 그러다가 이따금 백성들에게 내린 금주령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해 모범을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 왕의 금주가 실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백성들에게도 藥酒 또는 축하라는 명목 아래에서의 음주는 금주령 하에서도 용인되었고 아울러 사신 접대, 연향 등의 國用, 그리고 관리들의 음주는 허가되는 상황에서 백성들에 대한 금주령 자체가 엄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금주의 목적은 춘궁기의 곡식 저축이 가장 큰 것이었고, 때로는 과도한 음주로 禮를 어그러뜨리는 사례들이 발생하면서 禮道를 가르치기 위한 금주령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금주령은 여러 이유로 엄격히 지켜지지는 못했고 강력히 규제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재해를 맞았을 때 금주령이 먼저 내려지고 그 실효에 따라 왕도 차후 금주령에 동참하거나 감선의 해법을 동원하였다. 따라서 금주령과 감선은 초기에는 그 대상을 나누어 적용되는 것이었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금주령은 왕에게도 적용되었다. 자연재해가 왕의 失政에 대한 경고라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았지만 하늘에 대한 왕의 공구수성은 여전히 형식적인 것이나마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러한 형식적 행위는 그 수위를 높여서 금주령은 왕실과 국용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아울러 감선의 횟수도 늘어났다. 성리학적 정치철학이 강조될수록 과학적으로 연관관계가 없는 자연재해와 왕의 정치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태도가 더욱 강해졌으며 그러한 왕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가 바로 감선과 금주였던 것이다. 그래서 금주령에 대한 위반은 엄격한 법 집행으로 이루어졌고, 감선이 자연재해를 그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왕이라는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내외에 알리기 위한 의도적 태도로 더욱 빈번하고 강력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백성과 왕의 역할을 분리시켰던 초기의 금주령과 감선의 태도는 백성과 왕이 긴밀하게 묶여있음을 보여주는 정치적 의도가 작용하면서 후기로 갈수록 강조되었다. 왕의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관료들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책으로서 권력의 기저에 백성이 있음을 시사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바로 이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자연재해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표출한 것이 금주와 감선이며 그것은 곧 민의 영역과 왕의 영역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물론 금주령의 대상이 왕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감선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금주의 주체는 백성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금주와 감선, 두 가지 행동은 기상이변이라는 공통된 원인에 대한 실제적이고 이념적인 상반된 해결방안이었던 것이다. 즉, 백성은 현실적 해결책을 실행하는 존재였으며, 왕은 실제적 도움보다는 이념적이고 상징적인 행위가 기대되는 존재임을 강조했던 것이 바로 금주와 감선이었다. 그러므로 금주와 감선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실제적 행동과 이념적 행위의 표현 방법이었으며 국가적 재난에 대한 民과 王의 호응이었다.

목차

국문요약
1. 머리말
2. 禁酒令과 減膳의 시행과 연관관계
3. 禁酒令과 減膳 시행의 의도와 정치적 활용
4. 금주령과 감선의 관계와 변화의 배경
5.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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