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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변광석 (부경역사연구소)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한국민족문화 제69호
발행연도
2018.11
수록면
117 - 148 (32page)
DOI
10.15299/jk.2018.11.69.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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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석 (李澄石, 1395(태조4)~1461(세조7)) 장군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한 공로가 큰 인물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수사(同知中樞府事) 이전생(李全生;?~1450)이며 일찍이 무반으로서 명성이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이전생의 맏아들 징석은 동생 징옥(澄玉) · 징규(澄珪)와 함께 삼장수(三將帥)로 조선 전기의 대표적 무신(武臣)으로 인식되고 있다.
세 무신이 활동한 15세기 초~중엽은 조선왕조 건국 직후로서, 남으로는 고려 말부터 크게 창궐한 왜구의 침입이 매우 빈번했으며, 북으로는 여진족의 식량약탈과 침입이 잦았던 시기였다. 이와 같이 변방으로부터 잦은 약탈과 침략으로 위기의식이 팽배하던 분위기에 이징석과 이징옥은 태종대에, 그리로 이징규는 세종대에 각각 무과에 급제하여 무반직(武班職)으로 진출하였다. 특히 이징석은 시급한 변방 수비의 책임을 맡은 함길도절 제사나 국가의 국방정책을 수행하는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점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삼장수의 군사적 · 외교적 활동으로서 이징석은 여진 침입을 막기 위한 사군(四郡) 설치의 초석을 마련하고, 왜구 침입을 격퇴한 데에 공로를 세운 점, 이징옥은 여진 토벌의 계책을 마련하고 육진(六鎭)을 개척한 점이, 이징규는 명나라에 파견되어 가는 성절사(聖節使) · 천추사(千秋使)로서의 외교업무에 기여한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징석은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부장(副將)으로서 파저강(波猪江)전투의 승리를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조선의 건국 직후인 15세기 전반 시기가 대외적 안정이 급선무였던 상황에서 남북으로 왜구와 여진족의 무력 침략을 방어해 낸 업적이었다. 이는 곧 군비의 정비와 변방수비에 상당한 전략을 가지고 수행한 결과였다. 평안도 변방지역에 북방 이민족의 존립 근거지를 제거하고 침입의 위기를 결정적으로 막아낸 사군(四郡)설치의 업적이 중앙직으로서의 활동보다 의미가 더 큰 이유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조선 초기 정국과 세조의 집권
3. 三將帥 가문의 世系와 업적
4. 李澄石의 국방관과 활동
5. 맺음말 - 역사적 의미와 평가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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