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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출헌 (부산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전번역원 민족문화 민족문화 제52집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305 - 352 (4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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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국시로 내걸고 건국한 조선은 국가권력을 활용하여, 불교로부터 유교로의 사상사적 전환을 꾸준하게 진전시켜나갔다. 그리하여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 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계보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김굉필 · 정여창으로 대표되는 성종대의 신진사류가 그 계보에서 차지하는 도학의 실체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별로 없다. 자료의 일실이 주된 원인이겠지만, 그들의 생애자료와 시대적 동향에 대한 세밀한 탐구가 부족했던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본고는 그런 반성적 고찰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성종 14년(1483)에 보인 신진사류의 학문적 · 사상적 변화에 세밀하게 주목하고자 했다. 흥미롭게도 김굉필은 그 해 楊州로 물러앉아 비로소 『소학』이 아닌 다른 책을 읽어가며 강학활동을 시작했고, 남효온도 幸州에 敬止齋를 지어놓고 「心論」·「性論」·「命論」·「鬼神論」과 같은 성리학적 논설을 활발하게 집필했다. 뿐만 아니라 성종대의 신진사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김시습도 바로 그때 六經과 子史를 수레에 싣고 서울을 등지고 춘천으로 떠나버렸다.
이처럼 성종대의 신진사류들이 같은 해에 뿔뿔이 흩어져 서울 인근에 은거하며 새로운 삶과 새로운 학문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성종 7년의 親政을 계기로 일어난 성리학에 대한 지적 요구와 정치현실에 대한 좌절이 빚어낸 시대적 징후였던 것이다. 성종 13년에 일어난 竹林羽士 결성과 성균관 壁書詩 사건은 그런 변화를 암시하는 강력한 조짐이었다. 결국 성종 14년 봄의 과거 낙방을 계기로 젊은 그들은 『근사록』·『성리군서』·『성리대전』과 같은 성리서적을 통해 도학으로의 轉回를 도모해갔다. 하지만 김굉필을 제외한 南孝溫 · 李深源 · 李賢孫처럼 함께 분투했던 선구적인 존재는 道學의 계보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본고에서 성종 14년의 잊혀져간 그들을 새삼 주목하게 된 까닭이다.

목차

1. 프롤로그: 성종 14년에 주목하는 까닭306
2. 성종 14년 이전, 竹林羽士 모임과 성균관 壁書詩 파동
3. 성종 14년 그 해, 과거 포기와 새로운 삶으로의 전회
4. 성종 14년 이후, 性理書의 재발견과 성리학 담론
5. 에필로그: 성종 14년의 신진사류에 대한 기억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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