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노자 제 56장의 ‘玄同’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필자가 현동에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 까닭은 道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도처럼 이름 지을 수 없는 개념이 아니라 뚜렷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현동은 유무가 현묘하게 어울려 있는 것으로, 필자는 이것이 유무를 초월하여 개념화할 수 없는 도를 유의 영역(地上)에서 재정의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본고는 도를 인식하는 주체가 바로 여기, 유의 영역 즉 지상에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사유를 따라 노자가 말하는 도의 대강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노자 제 1장을 통해 有無의 의미를 고찰하였다. 필자는 유무를 한 데 묶고 이것이 도에서 나온 다음 지상에서 유무로 나뉘었다고 보고, 유무가 단지 ‘있음’과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유무는 언제나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다.
두 번째 장에서는 지금 여기 지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欲과 命을 주요 주제로 삼았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생존을 위해 없을 수 없는 기본적인 욕구 외에 유독 사람에게만 있는 가치에 대한 욕망을 전제로 이에 대비되는 命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命은 자칫 무분별할 수 있는 욕망을 생장소멸의 자연적 이치를 통해 조절하고 비울 수 있다는 것으로, 노자는 이 命을 알게 되면 비우게 되고 비우면 오래가고,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命은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는 것으로써 필자는 이것이 현동을 아는 것이고, 나아가 이 命을 아는 것이 바로 明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세 번째 장에서 明은 命을 알아 자연의 이치를 알고 자연대로 살아가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지상에서 현동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현동의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은 욕망을 초월하여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노자가 말하는 도를 깨달은 자가 바로 이 현동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필자가 볼 때 노자에서 말하는 현동의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유의 영역인 지상에서 개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각자의 주체적인 선택에 따라 노자가 말하는 성인이 되어 無爲之治를 행할 수도 있고, 속세를 벗어나 자연에 머물러 살 수도 있으며, 평범하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삶의 방식은 달라도 현동의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건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위태롭지 않게 하면서,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게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