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13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67 - 215 (4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연구의 목적은 1920년대 중국에서 과학의 성격과 그 적용범위를 놓고 전개되었던 ‘과현논쟁’에서 과학파의 주역으로서 ‘과학방법의 보편적 적용’을 주장했던 정문강의 과학사상과 활동을 그의 과학인식론과 과학근대화 사업의 실천과정을 중심으로 분석하려는 데 있다. 1910-1930년대 그는 실용과학자로서, 학술행정가로서 실천적 노력들을 기울임으로써 중국과학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중국과학주의 사조의 선도자로서 ‘存疑的 唯心主義’(Skeptical idealism)라는 과학인식의 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과학지식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存疑’의 대상을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 ‘증거’를 확보하고, 이를 위해 현실을 직시하며 실증과학의 지평을 넓혀갈 것을 강조했다. 또한 정확한 개념과 합리적 추론에 근거한 학습지식의 확대를 통해 ‘唯心’의 심리현상에서 야기 되는 비유와 억측 같은 ‘심리적 모호성’을 최소화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상식적이고 합리적 판단이 가능하게 되며, 이러한 판단의 기저에는 과학지식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存疑的 唯心主義’는 실용과학의 이론적 기초로서 이후 중국과학근대화 사업의 정신적 동력을 제공했다. 그의 과학사상에 대한 기존의 ‘유과학주의’ 평가는 그의 ‘과학방법의 보편적 적용’을 ‘과학만능론’으로 誤讀함으로써 비롯된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선행 연구의 한계는 정문강의 과학사상을 ‘유과학주의’로 간주하며 과도한 이념적 경향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혼동한 때문이었다. 또한 인도주의적 반과학주의 입장에서 이를 과학만능론으로 비판한 것은 분명히 당시 중국에 대한 구체적인 시대인식이 결여된 연구시각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즉 당시 중국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서구에서 전래된 ‘형식비평’의 결과였다. 중국과학 근대화과정에서 그의 실용과학자로서의 역할은 ‘과학국구론’의 기치 하에서「지질학 분야」와「국립중앙연구원」에서 보여준 그의 구체적인 사업 활동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북경대학의 명목상 지질학부서를 명실상부한 현대적 지질학과로 개편하고, 지질학연구소 설립을 통해 현장실습을 실시함으로써 현장지질조사를 위한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 또한 연구소에 필요한 각종「要綱」과 「章程」및 「廣告」를 입안함으로써 운영의 내실화를 기했다. 그리고 연구소에 필요한 기구의 개편과 설립, 조직인원의 효율적 배치, 국내학술간행물 발행, 국제학술교류, 도서관 건립 등을 통해 지질학연구소의 역량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이처럼 지질학 교육과 연구 및 조사의 기초를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현장의 지질탐사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를 통해 광물자원의 전국적인 분포를 파악하고 정확한 매장량을 측정함으로써 중국과학 근대화사업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국립중앙연구원」의 총간사직을 맡아 조직과 운영을 혁신함으로써 근대적인 국가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그는 硏究院의 조직과 인사, 재정 면에서 효율적인 운영을 단행함으로써 업무의 효율성 높였다. 또한 연구원에 대한 외부의 권력 개입과 내부의 권위적인 지배를 차단함으로써 연구원의 자율적인 운영체제를 갖추도록 했다. 그리고 ‘전국학술평의회’ 설립을 통해 硏究院의 ‘협의결정’을 상설화함으로써 전국적인 학술연구조직의 유기적 관계를 개선시켜, 硏究院 조직의 민주적 운영방식을 공식화 했다. 정문강은 ‘과학구국’의 꿈을 품고 과학사상의 현실적 적용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간파함으로써 과학사상을 학술영역으로부터 국가사회의 실천영역으로 확대시켰다. 그는 중국 근대 지질과학 기반의 확립과 발전, 학술연구기관의 제도적 혁신을 주도하면서 始終 낙후된 사회경제와 후진적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 했다. 정문강은 과학을 공허한 하나의 관념으로 간주하지 않고 언제나 현실적 상황과 결부시켜 거론했다. 특히 그는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서 하나는 硏究院의 일상적 업무인 과학적 방법을 이용한 각종 자연환경에 대한 관찰과 측정 및 실험 등을 중시했다. 여기서 나온 각종 통계자료들이 기술 산업발전에 귀중한 기초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과학방법을 이용한 천연자원의 개발과 생산기술의 혁신에 대한 국가차원의 연구를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정문강이 과학기구를 창설하고 과학학회를 설립하여 과학기술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몇 년 몇 개월에 걸쳐 실지 답사를 실시했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과학 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실용과학자로서 그의 구국정신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과학근대화 과정에서 정문강이 수행했던 구체적 과학 사업들은 주효했다고 보여 진다. 그러면 현대 중국과학주의 사조의 규명과 관련해 정문강이 주도했던 과학파의 위상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가 ? 당시 ‘구망’이 ‘계몽’을 압도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전통 고수의 현학파에 의한 적대시는 물론이고, 진영내의 이념적 분기에 따른 유물사관파(과학적 사회주의)의 비판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과학파(과학적 실용주의)의 위상은 새롭게 복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후 국가제도의 근본적 전환(사회주의 체제의 성립)은, 보다 강력한 이념세력(유물사관파)에 의해 가능했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의지를 지향했던 과학적 인과율(과학파)과 역사적 필연성을 추구했던 사회적 인과율(유물사관파) 간의 대립에서 점진적 개량을 추구했던 합리적 비판세력(과학파)은 역사의 패배자인가 ? 이후 ‘구망’(주자파 일소)을 위한 과도한 이념화가 경직된 국가체제(문화대혁명)를 초래했고, 이것이 국가경쟁력의 약체화를 가져왔다고 볼 때, 좌우 양극단을 배제하고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했던 합리적 비판세력의 역할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