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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48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113 - 150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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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기 당의 경제중심지였던 양주의 발전상황과 외국인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당시 국제무역의 전개와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검토 과정 속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당대에는 국가가 외국인 거주자들에 대해 엄격한 통제정책을 유지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관습과 재산권을 보호하는 포용적인 정책기조를 병행했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오아시스루트를 통해, 8세기 이후에는 해상루트를 통해 소그드인, 돌궐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들이 당을 방문하고 활기차게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대이후 책봉체제라는 정치적 논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적 세계질서가 서서히 와해되면서, 경제의 비중이 이 지역에서도 중요성을 점증해갔다. 또한 서역인과의 활발한 접촉을 통해 동아이사인의 세계관도 종전에 비해 확대되었을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 양주는 당정부의 새로운 재정명맥으로 부상한 곡창 강남지역을 장안, 낙양 등 전통적인 정치군사중심지와 연결시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최고의 상업도시로 부상하였고, 이에 따라 각지의 거상, 귀족, 이주민들이 집결하면서 공전의 호황을 구가하게 된다. 이렇게 소비환경이 조성되면서 南海路를 통해 광주로 입항했던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상인들이나 과거 오아시스 루트를 통해 장안일대로 이동했던 소그드인도 양주로 진입해 고가의 사치품시장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주로 寶石商이나 香料商으로 종사했는데, 양주의 시장근처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했고, 行會와 흡사한 상업조직을 결성해 매년 보석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그들은 지방정부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요청할 정도로 두터운 자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요구에 호응하며 지방정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양주는 또한 등주, 양주, 영파 등 중국의 무역항과 완도부근의 장도 일본의 큐우슈우 大宰府를 연결하며 동북아 무역을 주도하던 신라상인들이 드나들던 거점도시이기도 했다. 또한 당의 선진문명을 수입하기 위해 잦은 난파에도 불구하고 열성적으로 견당사를 파견하던 일본인들에게 다양한 상품을 공급해주는 최대의 구매코스이자 정보수집처 이기도 했다. 그들은 활동 중에 남해로를 통해 들여온 고가의 사치품들을 접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소그드 상인을 위시한 서역상인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갖고 자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동북아 인과 서역인과의 만남과 상인간의 교역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아라비아에서 인도와 동남아를 거쳐 중국으로 진입하는 ‘남해 무역권’과 한․중․일 삼국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세계 ‘동북아 무역권’이 함께 만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결합의 장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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