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문서학회 古文書硏究 古文書硏究 제49권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07 - 130 (24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문은 중국 吉林省 延吉市 延邊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古文書 자료 1점을 통해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살펴본 것이다. 하나는 조선 후기 조선인의 間島 이주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함경북도 지역에서만 존재한 ‘土奴婢’의 실체 및 성격이다. 고문서 자료는 1822년 12월, 함경북도 明川에서 거주한 李蓍衍이 관아로부터 발급받은 准戶口이다. 특히 이 준호구 자료는 현재 한국(남한 지역)에 소장된 함경북도 지역의 호적류 고문서 자료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조선시대 호적 자료 중 ‘土奴婢’가 발견되는 자료는 현재로서는 이 자료가 유일하다. 이시연은 公州 李氏로 이들 일가는 先祖 李謙이 燕山君 때 함경북도 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中宗反正으로 解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곳에서 거주하였고, 이후 그 후손들이 鏡城을 비롯하여 明川, 城津, 吉州 등에서 수백 년 이상 거주하면서 함경북도의 양반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李麒壽・鵬壽 형제가 임진왜란 때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후에 벼슬이 추증되고 彰烈祠에 配享됨으로써 공주 이씨는 경성의 명문세족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견고히 하였다. 그러다가 이시연의 5世孫인 鍾衡 때 두만강을 건너 중국 延邊의 和龍으로 이주하였던 것인데, 族譜에 기재된 내용으로 볼 때 이주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대략 1930년대로 추정된다. 중국 연변박물관에 이시연의 호적 자료가 소장된 배경에는 이들 일가의 間島 지역으로의 이주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시연의 준호구 자료에는 소유 노비가 총 6口(奴 1口, 婢 5口)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 소유 노비에서는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이들 6口의 노비가 모두 하나의 가족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 둘째, 5口의 婢 모두가 良人과 혼인을 했다는 점. 셋째, 소유 노비가 모두 ‘土奴’와 ‘土婢’로 기재되었다는 점 등이다. 비록 그 사례 건수가 적어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모든 婢가 良人과 交婚하였던 점은 여타 지역의 양상과는 다른 이곳 함경북도(또는 明川)만의 독특한 양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토노비는 함경북도에 거주하는 私奴婢에게만 붙여진 명칭인데, 더 중요한 것은 소유주 역시 함경북도에 거주하는 토착인이어야만 그 소유 노비를 토노비라 할 수 있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