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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각사상연구원 대각사상 대각사상 제11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17 - 70 (5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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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나옹의 불교계 행적과 유물·유적에 대하여 살펴본 연구이다. 나옹은 목은 이색과 같은 고향인 영덕에서 태어나 고려말 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사에 있어서 거목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은 당대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정신문화의 주류인 불교와 성리학계를 대표하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나옹의 행적 가운데 그 동안 잘 못 이해한 부분을 지적했고 나옹의 문도인 무학과 지천의 비문에 나타나는 사실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나옹은 신륵사에서 입적한 것이 아니라 유생들에 의해 주살을 당한 순교승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옹은 석가의 후신이라고 존경받았던 스승 지공의 뜻을 받들어 회암사를 중창하여 인도의 날란다사처럼 불교계의 메카로 삼으려 했다가 실패에 그치고 말았던 살아 있는 부처였다. 때문에 그러한 그를 추모하는 물결은 전국적으로 행하여져 명산대찰에 남아 있고 특히 1383년 묘향산 안심사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문도인 무학이 나옹의 뜻을 받들어 추모행사를 전개하였는데 회암사에 그의 스승 지공과 제자 무학의 부도와 비가 세워지게 되면서 원나라 법원사에 맺어진 세 고승의 인연의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나옹의 유물과 유적은 전국의 명산대찰에 남아 있게 된다. 나옹의 위상은 태고의 그것보다 매우 컸고 실제로 나옹은 지공과 더불어 생불이나 석가의 화신으로 추앙될 정도였다. 이러한 나옹의 위상은 조선왕조의 건국 후에도 지속되어 조선전기 불교계는 나옹의 문도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말 이후 지금까지 불교계에서는 나옹의 스승 지공과 제자 무학이 가장 영험이 큰 증명법사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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