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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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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한문교육학회 漢文敎育論集 漢文敎育硏究 제31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469 - 495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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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趙光祖가 실각함에 따라, 그와 함께 중앙에서 활동하던 湖南출신의 人士들은 귀향하여 道學의 연구와 실천에 힘쓰게 되었다. 그들을 ‘湖南士林’이라고 칭하는데, 본 논문의 대상인 梁山甫(1503~1557)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落鄕 이후 私的 학문연구 공간이며 교육·사교 공간인 別墅 瀟灑園을 마련하고 이곳을 찾는 호남사림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 현재의 소쇄원 정경은 설립된 16세기의 모습을 거의 온전하게 전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別墅와의 차별적 성격이며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쇄원의 조성자인 梁山甫에 관련된 자료는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다. 특히 그의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적은데, 그 중 「孝賦」는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孝賦」에 대한 전면적 분석을 통하여 梁山甫의 정신세계 및 학문세계를 고찰하였다. 梁山甫의 생애는 그가 죽은 지 120년 지나, 李敏叙(1633~1688)가 지은 行狀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梁山甫의 父系는 移住 일세대로 현달한 관직에 나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宋純(1493~1583)의 고모이고, 부인은 金允悌의 누나였다. 또 절친한 친구였던 金麟厚(1510~1560)와는 사돈관계이기도 하였다. 이런 호남지역의 人的 네트워크를 조성한 양산보는 일찍이 조광조 문하에 들어가 『小學』을 공부 하였고, 조광조 死後에는 절의를 지키며 효도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小學』을 굳게 믿고 모든 학문의 기초로 삼았으며, 자손들에게도 『小學』 공부와 실천을 강조 하였다. 이런 그의 신념과 학문적 역량이 49세 되던 1552년(명종 7) 「孝賦」라는 작품으로 형상화 되었고, 소쇄원 보존의 밑거름이 되었다. 「孝賦」는 214句로 이루어졌다. 이 「孝賦」에는 김인후가 같은 운자를 사용하여 次韻한 것이 210句 전한다. 「효부」를 짓게 된 동기는 사람 된 도리를 밝혀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효부」는 양산보 자신의 좌우명이며 후손들에 대한 유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손들도 양산보의 이런 효사상을 계승하여 『小學』정신을 실천함에 힘썼고, 「효부」를 가문의 자랑으로 삼았으며, 소쇄원을 원형대로 보존하여 오늘에 남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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