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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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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史叢(사총) 제95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285 - 320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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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생한 '프라하의 봄'에 대해 소련 지도부가 전격적인 무력개입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지적・사회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1968’로 상징되는 196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동・서냉전의 절정기이면서 동시에 전후 체제 전반에 걸쳐 복합적이면서 국제적인 균열들이 폭발하는 시기였다. 서방에서 반전운동,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 유럽의 68혁명 등 냉전적 사고를 뛰어넘는 매우 복합적인 사회운동들이 개별 사회 질서를 넘어선 변혁 운동으로 등장했다. 또한 사회주의권에서도 1950년대 중・후반 이후 다양한 개혁적 실험들이 진행되었다. 특히 관리체계의 혁신이라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 개혁 프로그램들이 실행되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한 체제 내 다양한 논쟁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소련에서만큼은 다수의 주류 관리 집단의 인식 핵심에 자유주의적 요소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요소들이라는 사고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것이 체제의 안보를 수호하는 핵심요소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최상층에서 중간관리자들까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들은 적어도 1960년대 당대까지 소련과 여타 사회주의 체제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의 핵심에 있던 소련 지도부에게 1967-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벌어진 사태는 체제 전체의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물론 그럼에도 구체적인 대응책을 놓고서 1968년 1월부터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 직전인 8월 초까지 끊임없는 논쟁이 이어졌다. 무력 개입은 그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무력 개입에 의한 정상화라는 비극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당시 소련 최고 지도부 다수의 의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련이라는 체제의 근간인 관리 집단 다수의 인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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