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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아라키 준 (경북대)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1호
발행연도
2019.9
수록면
149 - 185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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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3·1운동은 대구 3·1운동의 부차적 소규모 운동으로 간주되어 지금까지 한국사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다. 관련 선행연구에서는 경주 3·1운동의 규모나 시위장소 등에 관한 기본정보가 정확히 검토되지 않았고, 또한 경주 3·1운동 당시의 정황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그 뒤에 일어난 사건과의 연속성이 간과되었다. 경주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고찰하려면 경주 3·1운동의 실상을 정확히 확인하고 그 후속 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우선 관련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경주 3·1운동의 실상을 확인했다. 경주 3·1운동은 대구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노동리교회(현 경주제일교회) 기독교인의 주도로 준비되었다. 큰 장날 3월 13일의 계획은 모로가 히데오로 추정되는 일본인의 ‘밀고’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고, 작은 장날 노동리 봉황대 일대에서 3월 15일에 실행되었다. 그 규모는 원래 수천 명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밀고’로 인해 100-150명 정도의 비교적 소규모 시위로 끝났다.
다음으로 노동리교회 기독교인들이 전개한 경주 3·1운동의 후속 운동을 검토했다. 노동리교회 기독교인들은 1921년 가을 경주 시가지에서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 유물을 경주에서 보관․전시하려는 ‘금관총 출토유물 경주 유치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그 운동을 성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족의 기원적 의미를 지닌 고대신라의 유적·유물이 민족적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깨닫고, 신라 고적 사진을 상영하는 ‘환등회’를 구상하여 조선 각지를 순회했다. ‘환등회’는 노동리교회 부설 계남학교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한 모금 운동이었으나, 실제로는 신라 고적을 시각매체를 통하여 각지 조선인에게 소개함으로써 민족적 자각을 불러일으키려는 문화운동이었다. ‘환등회’는 조선인 사이에 경주가 ‘민족적 고장’으로 인식되고, 조선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그 정신은 오늘날의 한국인의 삶과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고는 경주 3·1운동이 그동안 대구 3·1운동의 부차적인 소규모 운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을 재검토하고, ‘유치운동’ 참여와 ‘환등회’ 전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부각시켜, 발생순서나 규모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경주 3·1운동의 전개
Ⅲ. 경주 3·1운동의 후속 운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日文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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